CHAPTER 9
선택의 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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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균열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소영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김문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늦기 전에... 제발...' 그 간청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며 소영의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안 돼."
소영은 주먹을 쥐고 일어섰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김문수가 도움을 청했다. 정조가 위험하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은 여기서 무력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할머니의 편지를 다시 펼쳤다. 촛불 아래에서 글씨들이 춤추듯 흔들렸다.
*시간의 문지기는 자정이 되면 나타난다. 하지만 그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문지기. 소영은 8장에서 할머니 상자에서 발견했던 검은 돌을 손바닥에서 굴렸다. 어제 처음 만졌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돌이 체온에 반응하며 미세하게 떨렸다. 이상했다. 분명 무기물인데 마치 심장박동처럼 규칙적으로 진동했다.
"할머니, 어떻게 해야 하죠?"
대답 대신 바람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도. 바람과 함께 희미한 향이 감돌았다. 할머니가 즐겨 피우던 침향이었다.
소영은 벌떡 일어나 할머니 방으로 뛰어갔다. 나무상자를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편지 말고도 분명 뭔가 더 있을 것이다. 할머니가 그냥 편지 한 통만 남겨두고 갔을 리 없었다.
상자 바닥을 손으로 더듬자 뭔가 걸렸다. 숨겨진 칸이었다. 나무판을 조심스럽게 들어내자 그 아래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비단에 싸인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소영의 손이 떨렸다. 비단을 펼치자 숨이 막혔다.
조선시대 궁중 의녀의 복식이었다. 하얀 저고리와 검은 치마, 그리고 머리에 쓰는 흰 수건까지. 옷감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전혀 색이 바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광택이 흘렀다.
복식 아래에는 또 다른 책이 있었다. 표지에 한자로 '시간의 약속(時間의 約束)'이라 적혀 있었다.
"이게..."
소영이 책을 펼치자 첫 페이지에서 할머니의 필체를 발견했다.
*소영아, 네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운명의 시간이 온 것이다. 우리 집안 여자들은 대대로 시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역사의 물줄기를 지켜왔다. 이제 그 역할이 너에게 넘어갔다.*
*이 복식을 입고 문지기를 만나거라. 하지만 기억해라. 한 번 건너가면 돌아올 수 없다. 그것이 시간의 법칙이다.*
소영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한 번 건너가면 돌아올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과거로 간다면...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이번에는 다른 필체였다. 더 오래된 글씨.
*시간의 문지기는 마지막 기회를 준다. 하지만 그 기회를 받아들이는 자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 익숙한 일상, 돌아갈 집. 모든 것을.*
*문지기는 묻는다. '무엇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것인가?' 그 질문에 명확히 답할 수 있는 자만이 문을 통과할 수 있다.*
소영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 현대의 삶, 이준혁, 자신의 연구, 미래에 대한 모든 계획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김문수의 절망적인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 정조의 위험이 임박했다. 자신만이 그들을 구할 수 있다.
소영은 복식을 가슴에 안았다. 옷감에서 희미한 온기가 전해졌다. 마치 할머니의 체온 같았다.
"할머니도 이런 선택을 했던 건가요?"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이번에는 더 강하게. 방 안의 모든 종이들이 바스락거렸다. 그리고 시간의 약속 책이 저절로 마지막 페이지로 넘어갔다.
거기에는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사랑은 시간을 초월한다.*
소영의 시야가 흐려졌다. 눈꺼풀이 뜨거워지며 볼을 타고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할머니의 메시지였다. 분명했다.
그녀는 복식을 꼭 안고 결심했다. 돌아갈 수 없더라도 상관없었다. 김문수와 정조를 구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었다. 할머니가, 그리고 그 전의 모든 여자들이 지켜온 사명이었다.
새벽 세 시.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문지기는 자정에 나타난다고 했다.
오늘 밤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소영은 의녀 복식과 시간의 약속 책을 가방에 넣었다. 8장에서 발견한 검은 돌과 할머니의 은팔찌도 함께 챙겼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과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영은 시간의 약속 책을 다시 펼쳤다. 한지의 거친 질감이 손끝에 와 닿았다. 촛불이 흔들리며 글자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첫 페이지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오르는 자여, 그대가 치러야 할 대가를 알고 있는가.*
*첫 번째 대가: 현세에서의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하리.*
*두 번째 대가: 과거에서 이룬 모든 것이 현재에 남지 않으리.*
*세 번째 대가: 마지막 선택의 순간, 사랑하는 이와 사명 중 하나를 택해야 하리.*
소영의 손끝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한지 위의 글자들이 그림자와 함께 춤을 췄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오래된 비단에서 나는 향이 코끝을 스쳤다. 할머니의 향수와 비슷했다.
"사랑하는 이와 사명 중 하나를..."
김문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거울 속에서 본 그의 절망적인 표정. 그리고 이준혁이. 자신을 걱정하며 찾아온 따뜻한 눈빛.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시간의 문지기는 달이 가장 어두운 밤, 자정에 나타나리. 그대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묻게 되리.*
*답하라. 그대는 무엇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것인가.*
*사랑인가, 의무인가, 복수인가.*
*그대의 답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리.*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두 개의 원이 서로 교차하고 있었고, 그 중앙에 여인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칼을, 다른 손에는 꽃을 들고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희미하게 그려져 있어서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왠지 자신을 닮은 것 같았다.
소영은 의녀 복식을 다시 꺼내 펼쳤다. 짙은 남색 치마와 흰 저고리. 금실로 수놓인 매화 문양이 촛불에 반짝였다. 옷감을 만져보니 부드러우면서도 질겼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강인함이 느껴졌다.
"이 옷을 입었던 사람도 나와 같은 선택을 했겠지."
소영은 복식을 가슴에 대고 거울을 보았다. 순간, 거울 속에서 다른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인이었다. 의녀 복식을 입고 있었고,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할머니..."
소영이 중얼거리자 거울 속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가거라.*
소영의 가슴이 뛰었다.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분명했다.
그녀는 복식을 조심스럽게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시간의 약속 책도 함께. 검은 돌과 은팔찌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과거로 가는 열쇠였다.
벽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곧 해가 뜰 것이다. 오늘 하루만 더 견디면 된다. 자정까지.
소영은 촛불을 끄고 방을 정리했다. 유품들을 다시 상자에 넣고,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치웠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과 작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방, 이 아파트, 이 시대의 모든 것과.
창밖으로 동이 트기 시작했다. 새벽 공기가 차가웠지만, 소영의 마음은 이상하게 평온했다.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컸다. 마침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은 것 같았다.
김문수를 구해야 한다. 정조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었다.
설령 다시는 현재로 돌아올 수 없다 해도.
오후 두 시쯤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소영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몇 시간 눈을 붙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꿈속에서도 계속 김문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영아, 제발...*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 길고 끈질기게.
"소영아, 나야. 준혁이."
문 앞에 서서 소영은 잠시 망설였다. 이준혁을 만나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어제 저녁 이후로 그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소영아, 걱정돼서 왔어. 문 좀 열어줘."
목소리에 애타는 기색이 역력했다. 소영은 문고리를 돌렸다.
이준혁이 서 있었다. 어젯밤 제대로 잠을 못 잤는지 눈가에 다크서클이 짙었고, 머리도 평소보다 헝클어져 있었다. 손에는 편의점 봉투를 들고 있었다.
"뭐 하고 있었어?"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제부터 연락이 안 돼서."
"그냥... 정리하고 있었어." 소영이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리?" 이준혁의 시선이 현관 너머 거실을 훑었다. "뭔 정리?"
"할머니 유품들." 소영은 문을 더 열어주지 않았다. "들어오지 마."
"왜? 뭔가 이상해, 소영아." 이준혁이 한발 다가섰다. "얼굴 좀 봐. 언제 마지막으로 밥 먹었어?"
그제야 소영은 자신이 언제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어제 아침? 그저께? 시간 감각이 흐릿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괜찮지 않아." 이준혁이 편의점 봉투를 들어 보였다. "샌드위치랑 우유 사왔어. 들어가서 같이 먹자. 이런 식으로 지내면 몸이 버티지 못해."
"정말 괜찮다고."
"소영아." 이준혁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나 정말 걱정돼. 어제 저녁부터 계속 이상한 얘기만 하고... 혹시 스트레스 때문에 환각이나 환청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야?"
환각? 환청? 소영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슨 소리야?"
"아니, 그게..." 이준혁이 말을 더듬었다. "거울에서 소리가 들린다거나, 조선시대 사람과 대화를 한다거나... 이런 건 정상적인 게 아니야. 전문가한테 한번 상담받아보자."
"전문가?"
"정신과 상담. 부담 갖지 말고. 요즘 많은 사람들이 받아. 특히 가족을 잃고 나서는..."
소영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터져 나왔다. 소영의 목소리가 떨렸고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정신과?"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도움을 받자는..."
"도움?" 소영이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간 웃음이었다.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준혁아, 나는 정말로 그들을 봤어. 김문수도, 정조도. 그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내가 도와야 한다고."
"소영아, 들어봐." 이준혁의 목소리가 더 간절해졌다. "그 사람들은 이미 죽었어. 200년 전에. 너는 살아있는 사람이고, 지금 여기 있어. 현실을 봐."
"현실?" 소영이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현실이 뭔데?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의미도 없는 하루하루? 그게 현실이라면 차라리..."
"차라리 뭐?"
소영은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과거로 가버리고 싶다고, 거기서 진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정말로 정신병원에 끌려갈지도 몰랐다.
"소영아, 제발." 이준혁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랑 같이 가자. 오늘 당장. 상담만 받아보자. 약간의 약물 치료만 받으면..."
"약물 치료?" 소영이 손을 뿌리쳤다. "내 정신을 흐리게 만들겠다는 거야? 그들의 목소리를 못 듣게?"
"그들의 목소리는 없어!" 이준혁이 소리를 질렀다. 복도에 메아리가 울렸다. 그는 잠시 후 목소리를 낮췄다. "소영아, 정말로 없어. 네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거야."
소영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분노와 좌절감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너는 모르겠구나."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원히 모르겠구나."
"뭘 모른다는 거야? 설명해봐.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소영은 잠시 망설였다. 정말로 설명해볼까? 시간의 약속 책, 할머니의 유품들, 자신이 과거로 갈 수 있다는 사실까지.
하지만 이준혁의 눈을 보는 순간 포기했다. 그 눈에는 이미 결론이 내려져 있었다. 그녀는 아픈 사람이고, 치료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됐어." 소영이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 준혁아. 걱정해줘서."
"소영아..."
"정말 고마워. 하지만 이제 가줘."
"나 혼자 못 가. 너 이런 상태로 둘 수 없어."
"나는 괜찮아." 소영이 문을 닫으려 했다. "정말로."
이준혁이 문틈에 발을 끼웠다.
"소영아, 제발. 나를 믿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거 알지? 네가 아프면 나도 아파. 같이 이겨내자."
사랑이라는 단어에 소영의 호흡이 잠시 멈췄다. 이준혁은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었다. 시간을 뛰어넘는 운명, 과거에서 들려오는 절박한 부름, 그리고 그것에 응답해야 하는 사명감.
"미안해." 소영이 속삭였다. "정말 미안해."
그녀는 힘껏 문을 밀었다. 이준혁의 발이 빠지면서 문이 닫혔다.
"소영아!" 밖에서 이준혁이 소리쳤다. "문 열어!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하지만 소영은 문고리에 등을 기대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복도의 형광등이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준혁의 주먹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소영아, 제발..."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소영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한가운데가 조여왔다. 하지만 이게 맞았다. 이준혁을 더 이상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는 이 시대의 사람이었고, 이 시대에서 행복해야 했다.
자신과는 달리.
소영은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문 너머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준혁은 정말 떠난 것 같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차가운 바닥을 더듬었다. 먼지가 손톱 밑으로 들어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일어서야 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거실로 돌아가자 오후 햇살이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와 있었다. 평범한 일상의 빛이었다. 소파 위에는 아침에 마시다 만 커피잔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어제 읽던 소설책이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 평화는 이미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소영은 침실로 가서 옷장을 열었다. 정갈하게 걸린 옷들 사이에서 가장 편한 옷을 꺼냈다. 청바지와 흰 티셔츠. 마지막으로 입을 현대의 옷이 될지도 몰랐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그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스물여덟 살의 몸. 아직 젊고 건강했다. 이 몸으로 조선시대를 견뎌낼 수 있을까?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단정하게 묶었다. 화장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의미 없어질 테니까.
"할머니." 소영이 거울 속 자신에게 말했다. "제가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는 건가요?"
거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영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흔들림이 없었다.
부엌으로 가서 물을 한 컵 마셨다. 목이 말랐다. 언제부터인지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냉장고 문을 열어봤다. 우유, 계란, 몇 가지 반찬들이 들어 있었다. 평범한 일상의 흔적들. 누군가 이 음식들을 버리게 될 것이다. 집주인이 될 수도 있고, 혹시 걱정이 되어 찾아온 이준혁이 될 수도 있었다.
이준혁. 그 이름을 생각하자 가슴이 다시 아려왔다.
소영은 냉장고 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준혁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그가 포기했다는 뜻일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일까.
손가락이 그의 번호를 찾아 헤맸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충분히 상처를 주었다. 더 이상 그를 고통스럽게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메시지를 썼다. 그리고 지웠다. 다시 썼다가 또 지웠다.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때로는 현재의 사랑을 버려야만 과거의 사랑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핸드폰을 소파 쿠션 사이에 끼워 넣었다. 더 이상 필요 없을 테니까.
시계를 봤다. 오후 네 시. 자정까지 여덟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책을 읽기에는 집중이 안 될 것 같았고, 텔레비전을 보기에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소영은 다시 할머니의 방으로 갔다. 나무상자는 여전히 열린 채로 있었고, '시간의 약속' 고서는 그 옆에 조심스럽게 놓여 있었다. 의녀복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고서를 다시 펼쳤다. 한문으로 쓰인 글자들이 오후 햇살 아래서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시간을 건너는 자는 두 세계에 속하지 못하리라.' 그 구절을 다시 읽으며 소영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두 세계에 속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의 현실이었다. 현대에서는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 제대로 살지 못했고, 과거에서는 현대의 기억 때문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해야 했다. 한쪽을 완전히 포기하고 다른 쪽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김문수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그 절망적인 부름. 그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의 무게를 지고 있을 것이다.
소영은 고서를 덮고 일어섰다. 결심이 서자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졌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마침내 방향을 정했다는 안도감.
창문 너머로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 도시의 마지막 노을을 보게 될지도 몰랐다. 소영은 창가에 서서 멀리 보이는 산들을 바라봤다. 저 산들도 조선시대에 있었을 것이다. 모양은 조금 달랐겠지만, 기본적인 윤곽은 같았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산의 능선, 강의 흐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은 마음.
소영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나는 미소였다.
시계가 열한 시를 가리킬 때, 소영은 모든 준비를 마쳤다. 할머니의 의녀 복식을 조심스럽게 접어 가방에 넣고, 시간의 약속 고서를 품에 안았다. 은팔찌는 손목에 차고 있었다.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과거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파트를 나서기 전, 소영은 마지막으로 거울을 들여다봤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생각보다 평온해 보였다.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보다는 해방감이 더 컸다. 마침내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해방감.
택시를 타고 박물관으로 향하는 동안, 도시의 불빛들이 창밖으로 흘러갔다. 네온사인, 가로등, 아파트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따뜻한 빛들. 이 모든 것들과 작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이 빛들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떠나가는 것들은 언제나 더 소중하게 보이는 법이었다.
"박물관이요? 이 시간에 문 열어요?" 택시기사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약속이 있어서요."
기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소영은 창밖을 바라보며 김문수를 떠올렸다. 그의 따뜻한 손, 진심 어린 눈빛,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었던 절망적인 목소리. 그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의 무게를 지고 있을 것이다.
박물관 앞에 도착했을 때는 십일 시 사십분이었다. 건물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소영에게는 친숙한 곳이었다. 수없이 드나들었던 곳, 처음으로 조선시대의 기억을 되찾았던 곳.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자,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는 곳이 될 것이다.
경비원은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마치 소영만을 위해 길이 열린 것처럼, 정문이 조용히 열렸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조선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으며 소영은 고서를 꼭 껴안았다. 책에서 미묘한 향이 났다. 오래된 종이와 먹의 냄새, 그리고 시간의 냄새.
조선실에 들어서자 익숙한 정적이 맞아주었다. 유리장 안의 유물들이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조의 어찰이 놓인 전시대 앞에 서자, 소영의 심장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이곳에서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자정이 되기까지 열 분 남았다. 소영은 전시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시간의 약속 고서를 바닥에 펼쳤다. 달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책장을 은은하게 비췄다. 글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두 시대를 오가는 자여, 마지막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다. 한번 건너간 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 신중히 선택하라. 사랑하는 자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각오가 있어야 한다."
소영은 손목에서 은팔찌를 풀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서 따뜻해졌다. 팔찌를 정조의 어찰 위에 올려놓는 순간, 공기가 미묘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자정의 종소리가 어디선가 울려왔다. 하나, 둘, 셋... 열두 번째 종소리가 사라지자, 어둠 속에서 신비로운 빛이 피어올랐다. 은은한 푸른빛이 전시실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시간 자체의 목소리 같았다.
"마지막 기회다. 한번 건너가면 돌아올 수 없다."
소영은 고개를 들었다. 빛 속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서 있었다. 시간의 문지기였다.
"알고 있습니다." 소영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저는 선택했습니다."
"후회는 없겠느냐?"
소영은 잠시 침묵했다. 이준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따뜻한 미소, 걱정 어린 눈빛. 하지만 김문수의 절망적인 목소리가 그 기억을 덮었다.
"없습니다."
빛이 더욱 강해졌다. 소영은 눈을 감았다.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