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과거와 현재의 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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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의 손이 혈흔 위를 맴돌았다. 종이에 닿지 않으면서도 그 붉은 글자들이 뿜어내는 차가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비릿한 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늦었다고? 아니야, 아직 아니야."
그녀는 은팔찌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세게 쥐었지만, 평소처럼 따뜻해지는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팔찌는 마치 죽은 것처럼 차갑고 무겁기만 했다.
"제발... 제발 돌아가게 해줘."
소영은 팔찌를 비비고 흔들고 입김을 불어넣었다. 예전처럼 빛이 나기를, 그 신비로운 소용돌이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몇 분이고 기다렸다. 하지만 은팔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형광등이 다시 한 번 깜빡였다. 그 순간 소영의 시야가 흔들렸다. 마치 물 속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일렁였다. 책상 위의 일기, 벽에 걸린 시계, 창문 너머의 어둠까지 모든 것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이게 뭐야..."
소영이 중얼거리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아니, 정확히는 모든 색깔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세상이 흑백사진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흑백의 세상 속에서 한 가지만이 선명한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혈흔이었다.
일기 위의 붉은 글자들만이 여전히 생생한 빨간색으로 번져나오고 있었다. 아니, 번져나오는 정도가 아니었다. 글자들이 종이에서 떨어져 나와 공중에 떠오르고 있었다.
'늦었다. 왕이 이미...'
붉은 글자들이 소영의 눈앞에서 춤을 추듯 돌아다녔다. 그 순간 소영의 귀에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영아... 어디 갔느냐..."*
김문수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마치 며칠 동안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전하께서... 전하께서 위험하시다..."*
소영의 가슴이 조여왔다. 숨이 가빠졌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마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문수 오빠!"
소영이 소리쳤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신 공중에 떠 있던 혈흔 글자들이 더욱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글자들이 뒤섞이고 다시 배열되면서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냈다.
*'시간이... 없다...'*
소영은 팔찌를 더욱 세게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세게 쥐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내가 구해야 해. 내가 구하겠다고 했잖아!"
그녀의 절규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형광등이 완전히 꺼졌다. 방 안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지만, 혈흔만은 여전히 붉은 빛을 내며 떠다니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소영은 자신의 거친 숨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김문수의 목소리. 점점 더 점점 더 희미해지는 그의 목소리.
*"소영아... 돌아와... 제발..."*
"가고 있어... 지금 가고 있어..."
소영이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은팔찌는 여전히 차갑고 무거웠다. 여전히 차갑고 무거웠다.
갑자기 방 안에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 혈흔 글자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불어서 끄는 촛불처럼.
"잠깐... 기다려... 사라지면 안 돼."
소영이 손을 뻗어 글자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빨간 빛이 스며들어 사라져버렸다. 김문수의 목소리도 점점 멀어져갔다.
*"소영아..."*
마지막 속삭임이 사라지는 순간, 형광등이 다시 켜졌다. 방 안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일기는 여전히 새로운 페이지에서 열려 있었고, 그 위에는 혈흔으로 된 글자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소영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은팔찌를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제는 울 기력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혈흔을 바라볼 뿐이었다.
"늦었다..."
그녀가 혈흔의 글자를 따라 읽었다. 그 순간 새로운 깨달음이 머리를 쳤다. 이 메시지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보고서였다.
정조가 이미 위험에 빠졌다는 것. 그리고 김문수가 혼자서 그 위험에 맞서고 있다는 것.
소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직... 아직 늦지 않았을 거야. 늦지 않았어야 해..."
소영은 은팔찌를 꽉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돌아가게 해달라고, 김문수와 정조를 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만 팔찌는 차갑기만 했다. 평소처럼 따뜻해지지도, 빛을 내지도 않았다.
"제발... 제발..."
소영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팔찌를 양손으로 감싸고 더 세게 집중해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평범한 장신구가 되어버린 것처럼.
"왜 안 돼? 왜?"
그때 연구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영아?"
익숙한 목소리에 소영이 고개를 들었다. 이준혁이 문가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과 놀람이 뒤섞여 있었다.
"이준혁?" 소영이 바닥에 앉은 채로 그를 바라봤다. "왜 여기에..."
"며칠째 연락이 안 되잖아." 이준혁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문자도 안 읽고, 전화도 안 받고.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해서 찾아왔어."
그제야 소영은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도, 갈아입지도 못한 채로 연구실에서 지냈던 것이다. 머리카락은 엉망이었고, 옷에는 음식 얼룩까지 묻어 있었다.
"아, 나..." 소영이 더듬거리며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준혁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그의 손이 따뜻했다. 너무나 따뜻해서 소영은 순간 현실감을 되찾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있었어?" 이준혁의 목소리에는 진짜 걱정이 묻어 있었다.
"며칠... 아니지, 몇 시간? 아니면..." 소영이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시간 감각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준혁이 연구실을 둘러봤다. 책상 위에는 먹다 남은 컵라면들이 쌓여 있었고, 바닥에는 각종 자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이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핏자국이 선명한 일기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야?" 이준혁이 혈흔을 가리켰다.
"아!" 소영이 황급히 일기를 덮었다. "그건... 그냥 연구 자료야."
"핏자국 같은데?"
"아니야. 그냥... 빨간 잉크야." 소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준혁이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깊게 패여 있었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초점을 찾을 수 없었다.
"소영아, 집에 가자." 이준혁이 부드럽게 말했다. "제대로 된 음식도 먹고, 샤워도 하고."
"안 돼." 소영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여기 있어야 해. 돌아가야 해."
"어디로?"
"그곳으로... 김문수한테... 정조한테..." 소영의 말이 어눌해졌다.
이준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소영아, 너 지금 뭔 소리 하는 거야?"
"시간이 없어. 늦으면 안 돼." 소영이 다시 은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이게 왜 안 되는 거지? 분명히 됐었는데..."
"무슨 팔찌?" 이준혁이 그녀의 손목을 봤다. "이거?"
"건드리지 마!" 소영이 팔을 움켜쥐며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이준혁은 확신했다. 소영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연구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소영아." 이준혁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일단 집에 가자.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해."
"당신은...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소영이 고개를 저었다. "나만이 할 수 있어. 나만이..."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구하는 거야. 그들을 구하는 거야."
이준혁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소영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맞췄다.
"소영아, 들어봐. 너 지금 많이 지쳐 있어.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했잖아. 이런 상태로는 제대로 된 연구도 할 수 없어."
"연구가 아니야..." 소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뭐야?"
소영이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닫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준혁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일단 집에 가자. 응? 제대로 쉬고, 정신을 차리면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소영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도 한계였다. 며칠 동안 거의 잠들지 못했고,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못했다. 몸이 비틀거렸다.
"고마워..." 소영이 작게 속삭였다.
이준혁이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러 부축했다. 연구실을 나서면서 그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바닥에 널린 자료들과 핏자국이 묻은 일기가 보였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소영을 집에 데려다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새벽 공기가 차갑게 피부를 스쳤다. 소영은 이준혁의 차에 몸을 맡긴 채 창밖을 바라봤다. 히터에서 나오는 따뜻한 바람이 얼굴을 감쌌지만, 마음은 여전히 과거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소영의 집 거실은 고요했다. 이준혁이 부엌에서 커피를 우리는 소리만이 새벽의 정적을 깨뜨렸다. 소영은 소파에 몸을 맡긴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 이준혁이 따뜻한 머그컵을 내밀었다. "설탕 많이 넣었어. 당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소영이 컵을 받아들었지만 입에 대지는 않았다. 그저 양손으로 감싸 쥐며 온기를 느낄 뿐이었다.
"소영아." 이준혁이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언제부터였어? 이렇게 된 게."
"뭐가?"
"연구에... 아니, 그 조선시대 인물들에게 이렇게 몰입하게 된 게."
소영의 손가락이 컵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원을 그렸다. "몰입이 아니야."
"그럼 뭐야?" 이준혁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섞였다. "며칠째 연락도 안 되고, 연구실에서 혼자 중얼거리면서... 마치 그들이 지금 여기 있는 것처럼 말하잖아."
소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준혁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타오르고 있었다.
"만약에 말이야." 소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에 정말로 그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면? 그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소영아..." 이준혁이 의자를 앞으로 당기며 몸을 숙였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야. 200년도 더 전에."
"아니야." 소영이 고개를 저었다. 머그컵이 그녀의 무릎 위에서 살짝 흔들렸다. "시간은...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직선이 아니야."
이준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슨 소리야?"
"김문수가 위험해. 정조도 마찬가지야.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소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그들이 죽을 거야."
"돌아간다고?" 이준혁이 일어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로 돌아간다는 거야?"
소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은팔찌의 존재도, 시간여행의 경험도, 모든 것이 현실처럼 느껴지지만 동시에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소영이 머뭇거렸다. "나는 그들을 만났어. 정말로."
이준혁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소파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영의 손을 잡았다.
"소영아, 들어봐. 너는 지금 현실과 연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어. 그 인물들에 대해 너무 깊이 파고들다 보니까..."
"아니야!" 소영이 손을 뿌리쳤다. 커피가 소파에 쏟아졌다. "당신은 모르세요. 김문수의 목소리를, 정조의 눈빛을 직접 본다면 이해할 거예요."
"소영아." 이준혁의 목소리가 더욱 간절해졌다. "제발 정신 차려. 너 지금 완전히..."
"미쳤다고 하려는 거야?" 소영이 벌떡 일어났다. "내가 미쳤다고?"
이준혁도 따라 일어서며 양손을 들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다만 너무 지쳐서..."
"지친 게 아니야." 소영이 거실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내게는 사명이 있어. 그들을 구해야 해. 역사를 바꿔야 해."
"역사는 바뀌지 않아!" 이준혁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 절망감이 묻어났다. "이미 일어난 일들은 바뀔 수 없다고!"
소영이 멈춰 섰다. 그녀가 이준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차가운 결연함이 담겨 있었다.
"너는 이해 못 해." 소영이 조용히 말했다. "너는 절대로 이해 못 해."
이준혁이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준혁의 어깨가 무너져 내렸다.
"그럼 나한테 이해시켜 줘." 그가 마지막 시도를 했다. "제대로 설명해 줘. 뭐가 일어나고 있는 건지."
소영이 고개를 저었다. "설명해봤자 믿지 않을 거잖아. 아니, 믿을 수 없을 거야."
"시도해봐."
"시간을..." 소영이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닫았다. 이준혁의 표정을 보니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이미 그녀를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라고 결론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소영이 돌아서며 말했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
이준혁이 한걸음 다가섰다. "소영아, 제발..."
"집에 가." 소영이 등을 돌린 채 말했다. "고마웠어. 정말로."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괜찮아." 소영의 목소리가 평온해졌다. 너무나 평온해서 오히려 더욱 불안했다. "이제 괜찮아."
이준혁이 한동안 망설이다가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서 그가 돌아봤다.
"내일 연락할게."
소영이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혼자 남은 소영은 쏟아진 커피를 바라봤다. 갈색 얼룩이 소파 쿠션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휴지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닦으면서도 그녀의 마음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김문수의 마지막 모습이, 정조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이준혁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오직 자신만이 그들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휴지가 갈색으로 물들었다. 소영은 계속해서 닦아냈지만 얼룩은 더 넓게 번져갔다. 마치 혈흔처럼.
그녀의 손이 멈췄다.
고문서에 묻어있던 그 붉은 자국들이 떠올랐다. 김문수의 피였을까. 아니면 정조의 피였을까. 소영은 휴지를 구겨 쥐고 일어났다.
거실이 텅 비어 보였다. 이준혁이 떠난 지 겨우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집 전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창밖으로는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먼지 입자들을 반짝이게 만들고 있었다. 평범한 월요일 오전이었다. 사람들이 출근길에 서두르고, 카페에서 커피를 사 마시고, 지하철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그런 평범한 아침.
하지만 소영에게는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목의 은팔찌를 만져봤다. 차갑고 무반응한 금속이 피부에 닿았다. 왜 작동하지 않는 걸까.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히 반응했었는데.
소파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집은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해서 자신의 심장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이상했다. 과거에서 돌아올 때마다 현대의 소음들이 귀에 거슬렸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였다. 침묵이 귀를 아프게 했다.
김문수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정조는 안전할까.
소영은 눈을 감았다. 집중하면 그들의 모습이 보일 것만 같았다. 창덕궁의 차가운 복도, 촛불이 흔들리는 서재, 김문수의 걱정스러운 눈빛...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준혁이었다.
'집에 잘 들어갔어?'
소영은 메시지를 읽고도 답장하지 않았다.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이미 과거에 머물러 있다고? 당신이 걱정하는 그 현실이 내게는 더 이상 진짜가 아니라고?
그런 말을 하면 이준혁은 더욱 걱정할 것이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휴학을 해야 한다고, 연구를 중단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소영은 휴대폰을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화면이 꺼지면서 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창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일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출근하는 사람,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부모,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소영만은 달랐다. 그녀는 두 개의 시간 사이에 끼어 있었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로.
이준혁의 마지막 표정이 떠올랐다. 걱정과 혼란, 그리고 어쩌면 실망까지 섞인 그 눈빛. 그는 자신이 알던 소영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몰랐다.
소영은 일어나서 창가로 걸어갔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평화로움이 소영에게는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과거에서는 매 순간이 생사를 가르는 문제였다. 정조의 안전, 김문수의 위험, 궁궐의 음모들. 모든 것이 절박하고 중요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여기서는 무엇이 중요한가?
논문? 학위? 취업? 연애?
모든 것이 하찮게 느껴졌다.
소영은 손목의 은팔찌를 다시 만져봤다. 여전히 차갑고 무반응했다. 마치 그녀를 포기한 것처럼.
"제발..." 그녀가 속삭였다. "제발 다시 한 번만..."
하지만 팔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액세서리처럼 그녀의 손목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소영은 창에서 등을 돌렸다. 집 안을 둘러봤다. 이곳이 정말 자신의 집인가? 자신의 삶인가?
모든 것이 낯설었다. 소파, 테이블, 책장, 심지어 자신의 손까지도. 마치 다른 사람의 삶 속에 떨어진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준혁이 뭐라고 하든, 세상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었다. 그녀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구해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은팔찌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었다. 할머니의 유품들 중에 분명 단서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방법이라도.
소영은 일어났다.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소영은 복도 끝에 있는 할머니 방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문고리에 손을 얹었지만 쉽게 돌리지 못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 방은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가끔 청소를 하긴 했지만, 물건들은 할머니가 생전에 놓아둔 그 자리 그대로였다.
문이 열리면서 묵은 장미향과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인 공기가 흘러나왔다. 소영은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작은 스탠드만 켜진 방 안은 온통 그림자였다. 할머니의 화장대, 오래된 서랍장,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들이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먼저 화장대로 향했다. 거울 앞에 놓인 작은 보석함을 열어보니 반지 몇 개와 목걸이들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은팔찌와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서랍을 하나씩 열어봤다. 화장품, 손수건, 오래된 사진들.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도 있었다. 한복을 입고 정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소영과 닮아 있었다.
서랍장으로 옮겨갔다. 여기에는 할머니의 옷가지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소영은 조심스럽게 옷들을 만져봤다. 실크 저고리, 면 치마, 털실로 짠 조끼들. 할머니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가장 아래 서랍을 열었을 때였다. 옷가지들 사이에서 작은 나무상자가 나왔다. 손바닥 크기의 오동나무 상자였는데, 표면에 섬세한 나전칠이 되어 있었다. 소영은 그것을 꺼내 들고 뚜껑을 열어봤다.
상자 안에는 낡은 편지 몇 통과 작은 열쇠, 그리고 이상한 모양의 돌 하나가 들어 있었다. 돌은 검은색이었는데 표면에 은빛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마치 글자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무늬였다.
소영은 편지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봉투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편지지를 꺼내자 할머니의 친숙한 글씨가 나타났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소영아,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이미 시간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을 것이다. 우리 집안의 여자들은 대대로 이런 능력을 타고났다. 하지만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소영의 손이 떨렸다. 할머니가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 자신의 능력을?
*'시간의 문지기라는 존재가 있다. 그는 두 세계를 오가는 자들을 지켜본다. 때로는 도움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시험에 들게 하기도 한다. 네가 만약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면, 문지기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소영은 마지막 문장에서 숨이 멎는 듯했다.
*'시간의 문지기는 두 세계를 오가는 자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 하지만 그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한쪽 세계에 갇히게 된다. 조심하거라, 소영아. 과거는 아름답지만 위험하다.'*
편지가 끝나기가 무섭게 방 안의 공기가 변했다. 화장대 거울에서 미세한 균열 소리가 들렸다. 소영이 고개를 들자 거울 표면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균열은 마치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서랍장 위의 작은 거울도 마찬가지였다. 벽에 걸린 손거울까지. 방 안의 모든 거울이 동시에 금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영아..."
김문수의 목소리였다. 절망에 차 있었다.
"소영아... 전하께서 위험하시다..."
목소리는 점점 또렷해졌다. 거울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분명했다.
"도와줘... 제발..."
소영은 편지를 떨어뜨리고 일어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거울들의 균열이 더 깊어지면서 그 틈새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문수야!" 그녀가 소리쳤다. "문수야, 들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목소리만 계속 들려왔다. 김문수의 간절한 부름이.
소영은 화장대 거울로 달려갔다. 손을 뻗어 거울 표면을 만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유리였다. 하지만 그 너머에서 분명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기다려!" 그녀가 외쳤다. "내가 갈게! 꼭 갈게!"
거울 속의 균열이 더욱 벌어지면서 김문수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려왔다.
"늦기 전에... 제발..."
그리고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거울들의 균열도 멈췄다. 하지만 금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상처처럼.
소영은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할머니의 글씨가 촛불처럼 흔들려 보였다.
시간의 문지기. 마지막 기회.
그녀는 상자 속의 검은 돌을 집어 들었다. 돌이 손에 닿는 순간 미세한 진동을 느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이것이 열쇠일까? 다시 과거로 갈 수 있는 열쇠?
소영은 돌을 꽉 쥐고 눈을 감았다. 김문수의 절망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정조가 위험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결심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돌아가야 했다. 문지기든 누구든 만나서 도움을 청해야 했다.
과거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