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돌이킬 수 없는 귀환
약 22분 · 8,507자
빛이 소영을 감쌌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쳤고, 발밑이 사라지는 느낌에 위가 뒤틀렸다. 시간의 문지기가 다시 말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너는 이 시대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소영은 눈을 뜨려 했지만 강렬한 빛 때문에 불가능했다. 목소리만이 어둠 속에서 울려왔다.
"이준혁이라는 남자, 너의 직업, 가족, 친구들. 모든 인연이 끊어질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소영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정말로?"
문지기의 목소리에 의외의 감정이 스며들었다. 연민 같은 것이었다.
"현대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꿀 수 있다."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눈을 감은 채로도 그녀의 결의는 흔들리지 않았다.
"김문수가 위험해요. 정조 임금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가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구할 수 없어요."
"그들을 구한다고 해서 역사가 바뀔 것이라고 확신하느냐?"
"확실하지 않습니다." 소영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 "하지만 시도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빛이 점점 더 강해져서 소영의 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구해야 할 사람, 둘 다 과거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소영은 숨을 멈췄다. 문지기의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문지기의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김문수에 대한 감정과 정조에 대한 사명감. 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뜻이었다.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 순간이 오면 최선의 판단을 내리겠습니다."
"현명한 답이다."
문지기의 목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기억하라. 과거로 가는 길에는 돌아올 수 있는 다리가 없다. 네가 선택한 것은 귀환이 아니라 정착이다."
빛이 폭발했다. 소영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고, 시간과 공간이 뒤엉켰다.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은 굉음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다.
소영은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몸 전체가 얼음처럼 차가웠고, 입안에는 금속 맛이 돌았다. 천천히 눈을 떴다.
낯익은 한옥의 처마가 보였다. 창덕궁이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공기가 무겁고 침울했다.
소영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궁녀들이 모두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상복이었다. 누군가 죽었다는 뜻이었다.
"아니야..." 소영의 입술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규장각 쪽으로 뛰어갔다. 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복도를 지나는 내관들의 표정이 모두 어두웠다.
"김문수... 김문수는 어디 있어요?"
지나가던 궁녀를 붙잡고 물었다. 궁녀는 깜짝 놀라며 소영을 쳐다봤다.
"의녀 마마께서는 어찌 이곳에..."
"김문수요! 규장각의 김문수는 어디 있느냐고요!"
소영의 다급한 목소리에 궁녀가 움츠러들었다.
"그... 그분은 이미 의금부에..."
소영은 벽에 등을 기댔다. 무릎이 떨렸다. 너무 늦었다. 그녀가 현대에서 망설이고 있는 사이 모든 것이 틀어져 버렸다.
"전하는요? 정조 전하는 어떻게 되셨어요?"
궁녀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전하께서는... 어제 독차를 드신 후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계세요."
소영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궁녀의 말이 귓속에서 맴돌았다. 홍국영의 계획이 이미 실행에 옮겨진 것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과거로 왔지만, 결국 아무것도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 정조가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의식불명이라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뜻이었다.
소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소영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궁녀의 말을 소화하려 애썼다. 독차. 의식불명.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맴돌며 현실감을 잃게 했다.
"어... 어디서 독차를 드셨다는 거예요?"
"홍국영 대감께서 올리신 차라고 들었습니다." 궁녀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평소 즐겨 드시던 용정차였는데..."
소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홍국영. 그 이름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홍국영. 그 이름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그녀가 현대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동안 홍국영은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지금 전하께서는 어디 계세요?"
"희정당에 계십니다. 어의들이 밤새 간병하고 계시지만..." 궁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맥이 너무 약하셔서..."
소영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희정당으로 향했다. 새벽 안개가 궁중 곳곳에 서려 있었고, 평소라면 고요했을 시간에도 여기저기서 발걸음 소리와 속삭임이 들려왔다. 궁전 전체가 긴장으로 가득했다.
희정당에 가까워질수록 소영의 심장은 더욱 빨리 뛰었다. 정조가 죽으면 안 되었다. 그녀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기 온 이유가 사라져 버린다. 김문수도, 조선의 미래도, 그 모든 것이 의미 없어진다.
희정당 앞에 도착했을 때 내관 둘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도 깊은 근심이 서려 있었다.
"의녀 마마?" 내관 중 하나가 소영을 알아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전하를 뵙고 싶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지금..."
"알고 있어요. 그래서 더욱 뵙고 싶은 거예요."
소영의 간절한 표정에 내관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잠시 망설이던 그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방 안은 침묵이 흘렀다. 평소 정조의 활기찬 목소리로 가득했던 공간이 지금은 죽음의 그림자에 휩싸여 있었다. 어의 한 명이 정조의 맥을 짚고 있었고, 또 다른 어의는 약재를 달이고 있었다.
소영이 침상 가까이 다가가자 어의가 고개를 들었다.
"의녀 마마, 전하의 상태가 매우 위중합니다. 독성이 강해 해독이 쉽지 않습니다."
"어떤 독인지 아세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어의가 목소리를 낮췄다. "맥상으로 보아 아편이나 그와 유사한 독성 물질로 추정됩니다. 호흡이 얕아지고 의식이 흐려지는 증상이 전형적입니다."
소영은 정조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평소 날카롭던 눈은 감겨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그러나 가슴이 미약하게나마 오르내리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요?"
어의가 고개를 저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루, 이틀... 길어야 사흘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소영의 손이 주먹으로 말렸다. 사흘.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김문수를 구출하고, 홍국영을 막고, 정조를 살려야 했다. 과연 가능할까?
그때 정조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소영이 급히 얼굴을 가까이 대자 아주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하지만 정조는 다시 깊은 의식불명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 짧은 순간이 소영에게는 희망의 신호로 느껴졌다. 완전히 죽지 않았다. 아직 싸울 수 있었다.
소영은 천천히 일어섰다. 절망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소영은 정조의 침전을 나서며 마음을 다잡았다. 먼저 김문수를 찾아야 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무사한지 확인해야 했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규장각으로 향했다.
새벽 공기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궁궐 곳곳에서 들려오는 낮은 울음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그녀의 불안을 더욱 키웠다. 정조가 쓰러진 후 궁중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규장각에 도착했을 때, 평소와 달리 문 앞에 서 있던 관리가 소영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영 나리? 어찌 이곳에..."
"김문수 대감을 찾고 있습니다. 어디 계신지요?"
관리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소영을 구석으로 이끌었다.
"나리께서는 모르셨나 보군요."
"무엇을 말입니까?"
"김 대감께서는..." 관리가 말을 망설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사흘 전, 의금부에 잡혀가셨습니다."
소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의금부에요? 무슨 죄목으로?"
"반역죄라고 들었습니다." 관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홍국영 대감께서 직접 체포 명령을 내리셨다고 하더군요."
반역죄. 그 단어가 소영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김문수가 반역자로 몰렸다는 것은 곧 홍국영이 모든 것을 장악했다는 뜻이었다. 정조가 의식불명인 상황에서 홍국영은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증거로...?"
"그것은 저희 같은 하급 관리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관리가 고개를 저었다. "다만 전하께서 쓰러지신 후 궁중 분위기가 급변했습니다. 홍국영 대감의 말씀이 곧 법이 되었고..."
소영은 벽에 등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김문수가 의금부에 갇혀 있다면, 그는 지금 고문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반역죄는 삼족을 멸하는 중죄였다.
"의금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관리가 더욱 주위를 살폈다. "소문으로는 김 대감께서 자백을 거부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홍국영 대감께서는 반드시 자백을 받아내겠다고 하셨답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소영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홍국영이 김문수를 고문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정조가 의식을 잃은 지금, 그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부터였습니까? 김 대감이 잡혀가신 것이?"
"정확히는 전하께서 쓰러지신 바로 다음 날이었습니다." 관리의 목소리가 더욱 작아졌다.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소영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홍국영은 정조를 독살한 후 즉시 김문수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모든 것이 치밀하게 계산된 일이었다.
"지금 의금부에 들어갈 방법이 있을까요?"
관리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나리. 홍국영 대감의 직접 명령으로 누구든 접근을 금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김 대감의 가족들도..."
"가족들도?"
"모두 연좌되어 별궁에 유배되었습니다."
소영은 벽에 기대어 서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김문수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까지 모두 위험에 빠진 것이었다. 홍국영은 정말로 완벽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다른 대신들은 어떻습니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나요?"
"감히 누가..." 관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전하께서 의식을 잃으신 상황에서 홍국영 대감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소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절망적이었다. 정조는 죽어가고 있고, 김문수는 의금부에서 고문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홍국영은 모든 것을 장악한 채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직 정조는 살아 있었고, 김문수도 자백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희망의 실마리는 남아 있었다.
"고맙습니다." 소영이 관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 말씀을 다른 곳에서 하셨다는 것은..."
"물론입니다." 관리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김 대감을 존경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소영은 규장각을 떠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의금부에 직접 들어갈 수는 없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김문수를 구하고 홍국영을 막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고, 정조의 목숨은 점점 위험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직 현대에서 가져온 지식과 정보가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든 활용해야 했다.
소영은 발걸음을 돌려 대비전으로 향했다. 정조의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곳에서 다음 계획을 세워야 했다.
대비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소영은 몸을 숨기며 주변을 살폈다. 밤이 깊어갈수록 궁중의 경비는 더욱 삼엄해졌고, 특히 정조의 침전 주변은 평소보다 두 배나 많은 내시와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홍국영이 의심받지 않기 위해 더 철저히 경계하고 있는 것 같군.'
소영은 숨을 죽이며 어둠 속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다행히 규장각에서 일하던 시절 익힌 궁중의 비밀 통로들이 기억났다. 담장 너머로 몸을 숨기며 우회로를 택했다.
침전 뒤편의 작은 문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가슴이 터질 듯 뛰는 것을 느꼈다. 문 앞에 서 있던 늙은 내관이 그녀를 발견했다.
"누, 누구시오?" 내관이 놀라며 물었다.
"저는... 김 대감의 부탁으로 온 자입니다." 소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의 안위가 걱정되어..."
내관은 잠시 그녀를 살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시군요. 김 대감께서 말씀하신 분이시로군요."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하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침전 안으로 들어선 순간, 소영의 코끝에 진한 약초와 향의 냄새가 스며들었다. 공기는 무겁고 답답했으며, 어디선가 은은한 향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조가 누워 있는 침상 주변에는 각종 약재들과 탕약 그릇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전하의 상태는 어떠신지요?" 소영이 내관에게 속삭였다.
"어제 저녁 홍국영 대감이 올린 차를 드신 후..." 내관의 목소리가 떨렸다.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어의들이 와서 진맥을 보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하더군요."
소영은 침상으로 다가갔다. 정조는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고, 숨소리는 가늘고 얕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정조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독이 틀림없어. 하지만 아직 완전히 퍼지지는 않은 것 같은데...'
현대에서 배운 의학 지식으로 판단해보니, 정조의 상태는 심각했지만 아직 되돌릴 수 없는 단계는 아닌 듯했다. 맥박은 약하지만 규칙적이었고, 동공의 반응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내관님, 전하께서 드신 차는 어디 있습니까?"
"홍국영 대감께서 가져가셨습니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시더군요."
소영은 이를 악물었다. 역시 홍국영은 치밀했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정조는 살아 있었고, 올바른 처치를 받는다면 회복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혹시 해독제 같은 것을..."
"어의들이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았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내관이 고개를 저었다. "홍국영 대감께서는 전하의 과로 때문이라고 하시며, 절대적인 안정을 취하도록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순간 소영은 정조의 손목을 잡고 맥박을 세심하게 확인했다. 현대 의학으로는 불가능했지만, 이곳에서라면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조선시대의 한의학은 독성 치료에 있어서 나름의 체계가 있었으니까.
정조의 맥박이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희미하게 뛰고 있었다. 약하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심장의 고동이었다. 이 미약한 생명의 신호가 그녀에게는 한 줄기 희망처럼 느껴졌다.
'아직 늦지 않았어. 반드시 살려낼 수 있을 거야.'
바로 그때,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소영이 급히 돌아보니, 홍국영이 칼을 빼든 채 침전 입구에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위험했으며, 입가에는 음침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소영은 순간 숨을 멈췄다. 홍국영의 시선이 그녀를 꿰뚫고 있었고, 그 손에 든 칼날이 촛불에 반사되어 차갑게 번뜩였다.
"내관아, 물러나거라."
홍국영의 명령에 내관이 황급히 절을 올리며 물러났다. 침전 안에는 의식불명인 정조와 소영, 그리고 홍국영만 남았다. 정적이 흘렀다. 소영은 정조를 보호하듯 그의 침상 앞에 서서 홍국영을 마주했다.
"궁녀 차림을 하고 있지만." 홍국영이 한 걸음씩 다가오며 말했다. "그 눈빛은 평범한 궁녀의 것이 아니구나."
소영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말 한 마디라도 잘못하면 모든 것이 끝날 수 있었다.
"더욱이 전하의 맥을 짚는 솜씨라니." 홍국영의 목소리에 의심이 짙어졌다. "의녀도 아닌 것이, 어찌 그런 일을 할 줄 아는가?"
"저는..."
"침묵하거라." 칼끝이 소영의 목에 가까워졌다. "네가 누구든, 무슨 목적으로 여기 왔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네가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홍국영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정조의 상태를 직접 확인한 소영은 이제 위험한 증인이었다.
"전하께서 드신 차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홍국영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소영은 뒷걸음질쳤다가 침상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정조의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직 살아있었다. 아직 구할 수 있었다.
"혹시..." 소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해독제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홍국영의 움직임이 멈췄다.
"무슨 소리냐?"
"만약 전하를 깨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소영이 간절히 말했다. "대감께서도 원하시지 않겠습니까?"
홍국영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칼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소영을 다시 보는 시선에 계산적인 빛이 스쳤다.
"네가 그런 방법을 안다는 것이냐?"
소영은 숨을 깊이 들이마셰었다. 이것은 도박이었다. 하지만 정조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랐다.
"저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흥미롭구나." 홍국영이 음흉하게 웃었다. "하지만 네가 실패한다면?"
"그때는 대감의 뜻대로 하십시오."
침전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했다. 홍국영은 소영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계산이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좋다." 홍국영이 마침내 말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네가 전하를 깨운다면, 네 목숨은 살려주겠다. 하지만 네가 본 것, 들은 것은 모두 잊어야 한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실패한다면?"
홍국영의 칼날이 다시 번뜩였다.
"그때는 네가 전하와 함께 영원히 잠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