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음모의 그림자
약 23분 · 8,909자
차가운 원룸 바닥에 주저앉은 소영은 손목의 은팔찌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강렬하게 빛나며 시공간을 가르던 그것이 이제는 그저 차가운 금속 조각처럼 보였다. 아직도 미세하게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어, 방금 전까지 그곳에 있었던 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것—형광등 불빛, 플라스틱 냄새, 교통소음—은 그녀가 다시 21세기로 돌아왔음을 냉혹하게 일깨웠다.
"아니야..." 소영이 떨리는 손으로 은팔찌를 움켜쥐었다. "다시 보내줘. 제발."
팔찌는 차갑고 무반응했다. 마치 그동안의 모든 기적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소영은 벽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김문수의 마지막 표정이 눈앞에 선명했다. 그가 그녀를 향해 뻗은 손, 절망으로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그녀의 이름. 숨이 막혔다. 마치 가슴 한복판에 바위가 얹힌 것처럼 무거웠다.
"미안해." 그녀가 허공에 대고 속삭였다. "정말 미안해, 문수야."
새벽 네 시의 적막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만이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창밖으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빗방울들이 유리창을 따라 흘러내리는 모습이 그녀의 뺨을 타고 내리는 눈물과 닮아 있었다.
소영은 은팔찌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눈을 감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에 뭔가 걸린 것처럼 말이 막혔다.
"할머니, 제발 말해주세요.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사람을 혼자 두고 올 수 없어요. 정조 임금님도 위험하고... 나 없이는 안 돼요."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오직 빗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새벽 배송 트럭의 엔진음만이 그녀의 절규를 삼키고 있었다.
소영은 팔찌를 비비고, 문지르고, 간절히 기원했다. 예전처럼 뜨거워지기를, 예전처럼 빛이 나기를, 예전처럼 그녀를 그곳으로 데려가기를. 하지만 팔찌는 그저 차가운 금속 조각일 뿐이었다.
"왜?" 그녀가 울먹이며 물었다. "왜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나를 그곳에 보내놓고, 사랑하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혼자 두고 가라고요?"
팔찌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지만, 곧 그것마저 그녀의 착각임을 깨달았다. 떨리는 것은 팔찌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손이었다.
소영은 바닥에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형광등의 하얀 빛이 너무 차가웠다. 18세기 조선의 따뜻한 촛불, 달빛 아래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김문수의 눈빛과는 너무나 달랐다. 모든 것이 인공적이고 차갑고 생기 없었다.
"문수야." 그녀가 천장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나를 찾고 있을까."
호흡이 가빠졌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며 가슴을 두드렸다. 그가 규장각 뒷마당에서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의 절망, 그의 혼란, 그의 외로움. 모든 것이 그녀 때문이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게 잘못이었나." 소영이 자신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감정을 억눌렀어야 했나."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김문수의 의로움, 그의 따뜻함, 그의 진심. 어떻게 그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와 함께 있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진정 살아있다고 느꼈다.
새벽비가 더 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에 빗방울이 거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그녀의 마음속 폭풍과 닮아 있었다. 소영은 다시 일어나 은팔찌를 움켜쥐었다.
"제발." 그녀가 간절히 중얼거렸다. "한 번만 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새벽 여섯시부터 시작된 긴 기다림 끝에, 오전 아홉시가 되자 소영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했다. 자료실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이미 첫 번째 검색대 앞에 앉아 있었다. 밤새 울어서 부은 눈꺼풀 위로 형광등의 하얀 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검색어를 입력했다.
'정조 독살설', '홍국영 실각', '1781년 궁중 변화'.
화면에 뜨는 자료 목록들을 훑어보며, 소영은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역사학자로서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결과뿐이었다. 정조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홍국영이 어떤 식으로 실각했는지. 하지만 그 과정의 세세한 부분들, 특히 음모의 구체적인 방법이나 시기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소영아, 아직도 정조 연구하고 있어?"
동료 연구원인 박진우가 커피 한 잔을 들고 다가왔다. 소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평소라면 농담 섞인 대답을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진우 선배, 혹시 홍국영 관련해서... 기존 연구에서 다루지 않은 새로운 사료가 있을까요? 개인 문서나 일기 같은 것들 말이에요."
"홍국영?" 박진우가 의자를 끌어와 그녀 옆에 앉았다. "갑자기 웬 홍국영? 네 전공은 정조 정치사 아니었어?"
"그냥... 연구 범위를 좀 넓혀보려고요." 소영이 모니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정조를 이해하려면 그 주변 인물들도 파악해야 할 것 같아서."
박진우가 턱을 괴며 생각했다. "음, 작년에 안동 김씨 종가에서 기증받은 자료들 중에 홍국영 관련된 게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아직 정리 중이라 공개는 안 됐지만... 특별히 연구 목적이라면 열람 허가 받을 수 있을 거야."
소영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요?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을까요?"
"개인 서신이나 일기,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은데. 자세한 건 자료관리팀에 문의해봐." 박진우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런데 소영아, 괜찮아?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네, 괜찮아요. 그냥 연구에 몰두하다 보니..."
박진우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가 떠난 후 소영은 즉시 자료관리팀에 전화를 걸었다.
"안동 김씨 종가 기증 자료 열람 신청요? 잠깐만요..." 전화 너머로 키보드 소리가 들렸다. "홍국영 관련 자료는... 아, 있네요. 개인 서신 열두 점, 일기 형태의 기록 여섯 점. 연구 목적이시면 오늘 오후부터 열람 가능합니다."
소영의 손이 떨렸다. "지금 당장 볼 수 있을까요?"
"급하신가 보네요. 한 시간 후에 오시면 준비해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나서 소영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것이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국영의 개인 기록 속에 정조 독살의 구체적인 증거나 계획이 담겨 있다면, 그것으로 김문수와 정조를 모두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서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어?"
소영이 고개를 돌리자 다른 연구원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무의식중에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죄송해요. 연구 내용 정리하느라..."
"정조 시대가 그렇게 매력적이야? 요즘 완전히 빠져 지내는 것 같던데."
매력적이라는 말에 소영의 가슴이 아팠다. 그곳에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미 포기했을까? 그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체념했을까?
시계를 보니 아직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소영은 그 시간을 참고 자료를 더 찾는 데 사용하기로 했다. 홍국영에 대한 기존 연구들, 그의 정치적 행보, 정조와의 관계 변화. 모든 것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자료를 읽어가며 소영은 점점 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홍국영의 실각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그 이후 정조의 죽음까지의 시간도 너무 짧았다. 분명 그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바로 지금 그녀가 찾고 있는 답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 오후가 되자 소영은 일반 자료실을 벗어나 특별 보관실로 향했다. 여기에는 일반 연구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귀중한 사료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박물관 측에서 그녀의 연구 실적을 인정해 특별히 허가해준 공간이었다.
보관실의 문이 열리자 서늘한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온습도가 철저히 관리되는 이곳에서는 수백 년 전의 종이들이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소영은 목록을 확인하며 홍국영 관련 문서함을 찾았다. 그의 개인 서신, 상소문, 그리고 몇 점의 미공개 문서들이 들어있었다.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넘기며 읽어나가던 소영의 손끝이 어느 순간 떨리기 시작했다. 홍국영의 친필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문서 하나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약재 목록 같았지만, 자세히 읽어보니 그것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반하(半夏) 삼 돈, 천남성(天南星) 이 돈, 부자(附子) 일 돈...'
약재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지만, 소영이 문서를 다시 들여다봤다. 글자 하나하나를 다시 확인했다. 이 조합은 그녀가 알고 있는 어떤 처방과도 달랐다. 오히려 독성이 강한 약재들의 위험한 조합이었다. 문서를 더 읽어나가자 그녀의 예감이 맞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상왕께서 평소 즐기시는 차에 혼합하되, 맛을 가리지 못하도록 계피와 감초를 더할 것. 삼일에 걸쳐 소량씩 투여하면 병세가 자연스럽게 악화될 것이며...'
문서가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소영은 황급히 문서를 붙잡으며 다음 줄을 읽었다.
'사후에는 의원들로 하여금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급사로 진단하도록 하되, 부검은 절대 허용하지 말 것. 모든 관련자는 즉시 변방으로 유배 보내어 입을 막을 것.'
문서가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것은 단순한 의심이나 추측이 아니었다. 정조를 독살하려는 구체적이고 치밀한 계획서였다. 투약 방법부터 사후 처리까지, 모든 것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런..."
작은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문서 끝에는 날짜까지 적혀 있었다. '정유년 윤이월 초나흘'. 정조가 실제로 승하한 날짜와 정확히 일치했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역사가 기록한 정조의 급작스러운 죽음 뒤에는 이런 음모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소영은 문서를 다시 한번 꼼꼼히 읽었다. 약재의 정확한 분량, 투약 시기, 증상 진행 과정까지. 모든 것이 의학적 지식에 기반해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었다. 이 정보만 있으면 정조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이 무엇인지, 언제 투약될 것인지, 어떤 증상이 나타날 것인지 모든 것을 미리 알 수 있다면.
하지만 동시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문서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런 중대한 역사적 사실을 자신이 알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이 가져올 결과를 생각하니 온몸이 떨렸다.
"내가 정말 이런 걸 해도 되는 걸까?"
보관실의 정적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만이 작게 울렸다. 그러나 김문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그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모습, 정조가 홀로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을 상황을 상상하니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소영은 문서를 다시 한번 정확히 기억하려 노력했다. 약재 이름 하나하나, 분량, 투약 방법. 이 모든 정보가 그들을 구할 열쇠가 될 것이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문서 위를 조심스럽게 따라가며, 역사의 진실과 마주한 이 순간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꼈다.
소영은 서둘러 문서들을 정리하고 보관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머릿속으로 방금 본 내용들을 반복해 암기했다. 반하 삼 돈, 천남성 이 돈, 부자 일 돈... 하지만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박물관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휴게실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 캔을 손에 들고 플라스틱 의자에 주저앉았다. 형광등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캔을 열어 한 모금 마셨지만 이미 식어버린 커피는 쓰기만 했다.
"정조를 구할 수 있어."
작게 중얼거린 말이 공허하게 울렸다. 홍국영의 문서에 적힌 내용들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약재의 이름, 정확한 분량, 투약 시기. 모든 것이 구체적이고 치밀했다. 이 정보만 있으면 독살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른 생각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역사를 바꾼다는 것. 그 말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정조가 살아남는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질까? 그의 개혁 정책들이 성공한다면? 일제강점기는? 한국전쟁은? 현재의 대한민국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을까?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혔다. 커피 캔을 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나비효과..."
대학 시절 배운 카오스 이론이 떠올랐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 하물며 한 나라의 왕을 살리는 일이라면? 그 파급효과는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소영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형광등의 차가운 빛이 눈을 아프게 했다.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수없이 들었던 경고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역사는 이미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할 뿐,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 바꿀 수 있다면?"
자문자답이 이어졌다. 만약 정말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리고 정조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일 아닐까?
김문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마지막에 보여준 절망적인 표정, 자신을 애타게 부르던 목소리. 그는 지금도 그 시대에 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정조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지켜봐야 하는 상황에서.
"아니야."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한 나라의, 아니 전 세계의 역사가 걸린 문제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네가 아는 정보로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데도 가만히 있을 것인가?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커피 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소리가 휴게실에 울렸다. 소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만약... 만약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상상해봤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알게 된 정보를 묻어둔 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러면 역사는 원래대로 흘러갈 것이다. 정조는 죽고, 조선은 세도정치의 늪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은 평생 이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 구할 수 있었던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는, 막을 수 있었던 비극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함께.
소영은 주머니에서 은팔찌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찬 금속의 감촉이 피부에 닿자 어떤 전율이 흘렀다. 이 작은 장신구가 시공간을 넘나드는 열쇠라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내가 정말 이런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형광등 불빛 아래서 은팔찌가 은은하게 빛났다. 마치 대답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소영은 박물관을 나서며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들을 정리하려 했다. 홍국영의 문서에 기록된 그 끔찍한 계획들—특정 약재의 조합, 정확한 투약 시기, 사후 처리 방안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 구체적이고 치밀했다. 이것은 단순한 음모가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이었다.
아파트로 돌아온 그녀는 곧장 할머니 방으로 향했다. 오래된 나무 냄새와 장미 향수의 잔향이 여전히 공기 중에 머물러 있었다. 소영은 책상 서랍에서 할머니의 일기를 꺼내 들었다. 낡은 가죽 표지가 손끝에 닿는 순간, 묘한 안정감이 찾아왔다.
일기를 펼치며 그녀는 다시 한번 할머니의 필체를 따라 읽어 내려갔다. 처음 읽었을 때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나 옛이야기 정도로 여겼던 구절들이 이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 가문은 조선의 마지막 성군을 지켜야 할 운명을 타고났다.'*
*'때가 되면 누군가는 그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소영의 손가락이 글자 위에서 멈췄다. 할머니는 정말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후손 중 누군가가 과거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할머니... 당신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거네요."
그녀는 일기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페이지가 있었다. 종이가 살짝 접혀 있어서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소영이 조심스럽게 펼치자, 할머니의 마지막 메시지가 드러났다.
*'소영아, 네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때가 온 것이구나.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 가문의 피에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이 흐르고 있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너는 구해야 할 사람을 구하고, 바꿔야 할 역사를 바꿔라. 그것이 네가 태어난 이유다.'*
소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할머니는 정말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언젠가 과거로 떠날 것도,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나는... 나는 정말 돌아가야 하는 거네요."
그녀는 은팔찌를 꺼내 손목에 찼다.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닿자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맥박을 뛰고 있었다.
소영은 눈을 감고 간절히 기원했다. 김문수를 만나고 싶다는 개인적인 그리움을 넘어서, 이제는 역사적 사명감이 그녀를 이끌고 있었다. 정조를 구해야 한다. 홍국영의 음모를 막아야 한다.
"제발... 제발 다시 한번만..."
그 순간이었다.
방 안의 형광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그러더니 갑자기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소영은 눈을 떴다. 뭔가 이상했다. 공기가 달라졌다. 무겁고 끈적한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할머니의 일기가 저절로 펄럭이기 시작했다. 바람도 없는데 페이지들이 빠르게 넘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췄다.
소영이 다가가 보니, 일기가 완전히 새로운 페이지에서 열려 있었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는 없던 페이지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붉은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아니, 글씨가 아니었다. 혈흔이었다.
혈흔이 글자 모양을 이루며 종이 위에 번져 나오고 있었다. 소영은 숨을 멈추고 그 글자들을 읽었다.
*'늦었다. 왕이 이미...'*
문장이 끝나기 전에 혈흔이 더 이상 퍼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쓰다가 급히 멈춘 것처럼.
소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이것은 경고였다. 아니, 예언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 돼... 아직 늦지 않았어. 아직..."
그녀는 은팔찌를 움켜쥐고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형광등은 계속해서 깜빡였고,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시공간의 경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소영은 혈흔이 번진 일기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기다려요, 문수 오빠...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