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금지된 감정
약 24분 · 9,558자
정조의 급보 소식이 전해진 지 몇 시간이 지났다. 소영은 김문수가 '따라오지 마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지만, 정조의 급보 소식이 전해진 후 그가 혼자 있을까 봐 걱정되어 조심스럽게 규장각으로 향했다. 복도 끝에서 그의 모습이 보였을 때, 그녀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어젯밤 대화가 성공적이었다는 생각에 걸음이 빨라졌지만, 곧 다가올 위험들을 떠올리자 복도의 그림자가 더욱 깊게 느껴졌다.
"오늘은 정조 전하께서 어떤 문서들을 검토하실 예정인지 확인해보겠나이다." 김문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의심스러운 인물들이 접근하는지도 살펴보겠소이다."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복도 끝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면서도 위압적인 그 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경직시켰다.
"누군가 오고 있소." 김문수가 소영의 팔을 살짝 잡았다.
촛불의 흔들리는 불빛 사이로 한 인물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소영이 무의식적으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 당당한 걸음걸이, 곧게 편 어깨선을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홍국영이었다.
"이 시간에 규장각에 무슨 일이십니까?"
날카로운 음성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홍국영의 시선이 소영에게서 김문수에게로, 다시 소영에게로 오갔다. 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두 사람을 훑었다.
"어제 전하께서 급히 검토를 원하신 문서들이 있어 일찍 나왔습니다. 이 궁녀는 문서 정리를 도우러 왔고요." 김문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다.
"문서 정리를?" 홍국영의 시선이 소영의 얼굴에 머물렀다. "평범한 궁녀가 규장각 문서를 다룬다는 것이 적절한 일입니까?"
소영의 입이 바짝 말랐다. 홍국영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해부하듯 훑어보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가능한 한 작게 몸을 움츠렸다.
"단순한 분류 작업일 뿐입니다." 김문수가 자연스럽게 소영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중요한 내용에는 접촉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규칙은 규칙이지요." 홍국영이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다.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에는 더욱 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도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며 세 사람의 그림자를 벽에 기괴하게 투영했다. 소영은 자신의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릴까 봐 숨을 죽였다.
"물론입니다." 김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하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이라..."
"전하의 지시?" 홍국영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어떤 지시 말입니까?"
위험한 순간이었다. 소영은 김문수의 어깨가 미세하게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거짓말이 들통날 위기였다.
그때 김문수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규장각 내 오래된 문서들의 분류 체계를 재정비하라는 지시였습니다. 특히 선왕 시대의 기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언제든 참고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셨지요."
"선왕 시대 기록이라..." 홍국영이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영조대왕의 탕평책 관련 문서들이 산재해 있어서 찾기가 어렵다고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김문수가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그래서 이 궁녀에게 단순한 연도별 분류를 맡겼던 것입니다."
소영은 김문수의 답변을 들으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짓말이지만 충분히 그럴듯했고, 홍국영도 쉽게 확인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홍국영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소영을 훑었다. 그 시선 아래서 소영은 자신이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모든 것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 등골이 서늘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홍국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다만 앞으로는 이런 일에 대해서도 미리 보고를 받았으면 합니다. 궁중의 보안을 위해서 말이지요."
"물론입니다." 김문수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홍국영이 한 번 더 소영을 날카롭게 바라본 뒤 돌아섰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져갈 때까지 두 사람은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완전히 조용해진 후에야 소영이 긴 숨을 내쉬었다. 등의 옷감이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괜찮소?" 김문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다행히..." 소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어요."
김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홍국영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오. 앞으로 더욱 조심해야겠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함께 헤쳐나갔다는 사실이 두 사람 사이에 무언의 끈을 만들어냈다.
"이제 안전한 곳으로 가시지요." 김문수가 조용히 말하며 복도 끝을 살폈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랐다. 두 사람은 조용히 규장각 본관을 빠져나와 뒷마당으로 향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얼굴을 스쳤고, 멀리서 이른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규장각 뒷마당은 아직 어둠에 싸여 있었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바깥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소영은 마침내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후..." 그녀가 깊게 숨을 내쉬며 담장에 등을 기댔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김문수도 그녀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쪽 하늘 끝에서 희미하게 밝아오는 빛이 보였다. "홍국영의 의심을 완전히 풀지는 못한 것 같소." 그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그래도 당신이 기지를 발휘해서 위기를 넘겼잖아요." 소영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규장각 문서 정리라니, 정말 순간적인 판단이었는데도 완벽했어요."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대도 침착했소. 많은 사람들이 홍국영 앞에서는 긴장해서 실수를 하는데, 그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소."
"동요하지 않았다고요?" 소영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속으로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는데요. 등에 식은땀도 흘렸고요."
"그런데도 표정 관리를 완벽하게 했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오."
새벽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방금 전까지의 긴장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를 편안한 정적이 채웠다.
"고마워요." 소영이 진심으로 말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정말 어떻게 될 뻔했는지..."
"무슨 말씀을 하시오." 김문수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한 팀이 아니오? 서로 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한 팀. 그 말이 소영의 가슴에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이 시대에서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당신은 정말..." 소영이 말을 시작하다가 멈췄다. 김문수가 궁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어떻소?"
"믿음직스러워요." 소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옳은 판단을 내리시는 것 같아요."
김문수가 잠시 시선을 돌렸다. 새벽 공기가 차가웠지만 그의 얼굴에는 온기가 돌았다. "그대야말로... 용감하고 지혜로우시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공기 중에 무언가 달라진 기운이 흘렀다. 단순한 동지애를 넘어서는, 더 깊고 복잡한 감정이 그들 사이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소영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런 감정은 위험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날이 밝아오네요." 그녀가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문수도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빛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렇소. 곧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오."
"그럼 이제 들어가야겠네요."
"그렇소." 김문수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소영도 마찬가지였다. 이 순간이 끝나는 것이 아쉬웠다.
바람이 불어와 소영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김문수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에서 떨어진 나뭇잎을 떼어냈다. 그의 손이 스치는 순간, 소영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고맙습니다." 소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새벽의 정적 속에서 그들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김문수의 손길이 머무른 자리가 아직도 따뜻했다. 소영은 그 감촉을 지우려 어깨를 살짝 움직였지만, 오히려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그의 눈빛이 자꾸만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더 오래 바라보고 싶기도 했다.
"소영 낭자." 김문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아니, 방금 전 일을 함께 겪으면서 느낀 것이 있소이다."
소영의 가슴이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고, 그것이 두려웠다.
"낭자의 용기와 지혜에 감탄했소.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오히려 나를 도와주었소이다." 김문수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이런 마음을 품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김 대감님." 소영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더 이상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저는..."
"아니오, 들어주시오." 김문수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이 마음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소이다. 낭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무언가 다르다고 느꼈소. 낭자의 눈빛에는 다른 여인들과는 다른 깊이가 있었소."
소영은 뒤로 물러서고 싶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진심 어린 고백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저 또한..." 소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감님을 보며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이 시대 사람이 아니야. 언젠가는 돌아가야 해.' 속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김문수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무엇이 낭자를 망설이게 하는지 모르겠소이다. 신분의 차이라면..."
"그런 게 아닙니다." 소영이 고개를 저었다. "저에게는... 저에게는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무슨 사정이든 상관없소." 김문수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낭자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든, 어떤 비밀이 있든..."
소영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자신이 21세기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 언젠가는 원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감님은 모르십니다." 소영이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제가 얼마나 먼 곳에서 왔는지..."
"그렇다면 알려주시오." 김문수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소영이 재빨리 손을 뒤로 숨겼다.
손목의 은팔찌가 차갑게 느껴졌다. 마치 경고하는 것 같았다. 감정에 휩쓸리지 말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말라고.
"저는... 저는 대감님의 마음에 보답할 수 없습니다." 소영이 애써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김문수의 얼굴에 그의 어깨가 살짝 처졌다. "그곳이 어디든 나와 함께할 수는 없는 것이오?"
소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대신 고개를 돌려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벽빛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낭자." 김문수가 다시 불렀다. "나는 기다릴 수 있소. 낭자가 준비될 때까지..."
"안 됩니다." 소영이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대감님은... 대감님은 더 좋은 분을 만나실 겁니다. 저 같은 사람이 아닌..."
"낭자 같은 사람?" 김문수의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낭자보다 더 나은 사람을 어디서 찾는단 말이오?"
소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목구멍이 메어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진심이 너무나 고마웠고, 동시에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이런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되는데, 이렇게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되는데.
바람이 다시 불어와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메웠다. 꽃향기가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소영은 이 순간을, 이 감정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들어가겠습니다." 소영이 돌아서려 했다.
"소영 낭자." 김문수가 목소리를 낮춰 불렀다. "정말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것이오?"
소영이 걸음을 멈췄다.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을 다시 보면 자신의 결심이 흔들릴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달빛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은은하게 비췄다. 소영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지만, 김문수의 시선이 자신의 등에 머물러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다.
"낭자."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 돌아보지도 않으실 것이오?"
소영의 손이 치마 자락을 움켜잡았다. 돌아보고 싶었다. 그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충분히 위험한 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대감님."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모르는 대로 두시오." 김문수가 한걸음 다가왔다. "억지로 답을 찾으려 하지 마시오."
소영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그의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가슴이 더 빨리 뛰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21세기에서도, 이 시대에서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마음의 동요였다.
"저는..."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사람입니다."
"떠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소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기 계시지 않소?"
소영이 천천히 돌아섰다. 달빛이 김문수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간절함과 슬픔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소영은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내림을 느꼈다.
"대감님은 왜..." 그녀의 목소리가 잠겼다. "왜 저 같은 사람에게..."
"낭자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모르시오?" 김문수가 쓸쓸하게 웃었다. "홍국영 대감 앞에서도 당당했고, 위기의 순간에도 침착했소. 그런 낭자를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소?"
소영의 뺨이 붉어졌다.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 깊숙이 박혔다. 하지만 동시에 현실의 무게도 느껴졌다. 그녀는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김문수는 조선의 문신이었고, 그녀는 정체불명의 여인이었다.
"신분이 다릅니다." 소영이 힘겹게 말했다. "대감님은 훌륭한 문신이시고, 저는..."
"신분?" 김문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소? 낭자의 마음과 제 마음 앞에서 신분이 무슨 소용이오?"
달빛이 더욱 밝아졌다. 소영의 손목에 찬 은팔찌가 은은하게 반짝였다. 그 빛이 김문수의 시선을 끌었다.
"그 팔찌..."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특별한 것이오?"
소영이 놀라서 소매로 팔찌를 가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팔찌는 계속해서 미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반응하는 것처럼.
"그저... 가족의 유물입니다." 그녀가 얼버무렸다.
김문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길이 소영의 얼굴로 돌아왔다. 달빛 아래서 그녀의 얼굴은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깊은 슬픔도 함께 보였다.
"낭자." 그가 속삭였다. "제가 감히 여쭈어도 될까요? 정말로 우리에게는...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것이오?"
소영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의 간절한 목소리가 가슴을 저몄다. 대답하고 싶었다. '아니오, 가능성이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대감님."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만약 저에게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운명이라..." 김문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운명이 낭자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제가 막고 싶소."
"막을 수 없는 일이라면요?"
"그렇다면..." 그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눈가는 어두웠다. "이 순간만이라도 함께 있고 싶소."
소영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말이 너무나 따뜻했고, 너무나 절절했다. 이런 사람을 만났는데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저도..."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다. 달빛이 더욱 밝게 비추었고, 바람이 소영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김문수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 그녀의 뺨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마시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 순간만큼은 슬퍼하지 마시오."
소영이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거칠었다. 학자의 손이라기보다는 검을 잡아본 무인의 손 같았다. 그 손길에서 안전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순간, 손목의 은팔찌가 갑자기 더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강렬한 감정에 반응하는 것처럼.
소영이 깜짝 놀라 손목을 바라보았다. 은팔찌가 마치 별처럼 반짝이며 점점 더 강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처음 조선으로 왔을 때와 같은 현상이었다.
"이게 무슨..." 소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김문수도 그 이상한 빛을 보고 있었다. 달빛보다 훨씬 밝고 신비로운 빛이 그녀의 손목에서 퍼져나오고 있었다.
"낭자, 그것이..."
"아니에요." 소영이 급하게 소매로 손목을 가리려 했지만 빛은 옷감을 뚫고 새어나왔다. "이럴 리가 없어요. 아직..."
갑자기 그녀의 몸이 흔들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녀를 어디론가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발밑이 불안정해지고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소영!" 김문수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오?"
하지만 소영의 몸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달빛이 그녀를 통과해서 지나갔다. 마치 안개처럼, 물속의 그림자처럼 희미해져 갔다.
"안 돼요..." 소영이 간신히 중얼거렸다. "아직 안 돼요. 아직 시간이..."
은팔찌의 빛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 빛 속에서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공간의 경계가 뒤틀리고 있었다.
김문수가 그녀의 손을 필사적으로 잡았다. "가지 마라!"
하지만 그의 손이 소영의 손을 통과해 버렸다. 그녀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었다.
"문수님..." 소영의 목소리도 멀어져 갔다. "저는... 저는 정말..."
"소영아!" 김문수가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 절망이 담겨 있었다. "가지 마라! 날 두고 가지 마라!"
그는 다시 한 번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소영의 몸은 이미 반투명해져서 그의 팔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미안해요..." 소영이 울먹이며 말했다. "정말 미안해요..."
은팔찌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소영은 깜짝 놀라 손목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다만 마음 한편으로는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소영아!" 김문수가 미친 듯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소영아!"
하지만 이미 늦었다. 소영의 모습이 빛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 순간 그녀의 눈빛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과 미안함과 절망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빛이 사라지자 규장각 뒷마당에는 다시 고요한 달빛만 남았다. 김문수가 무릎을 꿇고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허공을 더듬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다.
"소영아..."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소영아..."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들을 흔들었다. 마치 그녀가 있었다는 것조차 꿈이었던 것처럼,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김문수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달이 점점 기울어가고 새벽이 다가왔지만,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밀려왔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그녀 없는 세상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하지만 그 깨달음은 너무 늦게 왔다.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지만, 김문수에게는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