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검서관의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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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의 은팔찌가 갑자기 타오르기 시작했다.
소영은 잠든 척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팔찌가 이렇게 뜨거워진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불덩이를 손목에 찬 것처럼 살이 타는 듯한 열기가 전해졌다.
"아, 뜨거워!"
작은 신음이 새어나왔지만, 이상하게도 팔찌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단단히 손목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소영은 다른 손으로 팔찌를 잡아당겨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험하다... 조심해야... 홍국영이...*
정조의 목소리였다. 어제 밤에도 들렸던 그 간절하고 절박한 음성이 은팔찌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소영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다. 정조가 실제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신호였다.
"김문수 나리!"
소영은 급히 일어나 김문수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작은 방에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김문수 나리, 일어나세요!"
그를 흔들어 깨웠다. 김문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아직 새벽인데..."
"전하께서 위험하십니다!"
소영의 절박한 목소리에 김문수의 잠이 완전히 깼다. 그는 소영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무슨 소리냐? 전하가 위험하다니?"
"지금 당장 확인해보셔야 해요. 정말 급한 일이에요!"
소영은 손목의 은팔찌를 보였다. 팔찌는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이게 뭐냐?"
김문수가 팔찌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깜짝 놀라며 손을 뺐다.
"뜨겁다! 이게 어찌 이리 뜨거운 거냐?"
"이 팔찌는... 이 팔찌는 전하와 연결되어 있어요.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집안은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다고..."
소영은 자신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설명하려 애썼다. 김문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대 집안이 왕실과 인연이 있다고? 그런데 왜 이제야 말하는 거냐?"
"저도 믿지 못했어요. 하지만 지금 이 팔찌가 이렇게 반응하고 있고, 전하의 목소리도 들렸어요. '위험하다', '홍국영을 조심하라'고..."
김문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홍국영이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그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홍국영이라고 했느냐?"
"네, 분명히 들었어요. 제발 지금 당장 전하의 안위를 확인해주세요!"
소영은 김문수의 옷깃을 붙잡고 간절하게 애원했다. 팔찌의 열기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김문수는 잠시 고민하더니 일어났다.
"알겠다. 규장각에 가서... 아니, 내가 아는 방법으로 전하의 상황을 알아보겠다."
"정말이십니까?"
"하지만 그대도 함께 가야 한다. 혼자 두기에는 너무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소영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김문수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직 고마워할 일이 아니다. 만약 그대 말이 거짓이라면..."
김문수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그 의미는 충분히 전해졌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이 아니에요. 이 팔찌가 증거예요."
새벽 찬 공기가 두 사람의 얼굴을 스쳤다. 소영의 손목에서 은팔찌는 여전히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는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서둘러야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규장각으로 향하는 길은 평소보다 길게 느껴졌다. 소영은 김문수의 뒤를 따르며 손목의 팔찌를 자꾸 만져보았다. 열기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지만, 여전히 미열처럼 따뜻했다.
"저기서 잠깐 기다려라."
김문수가 규장각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벌써 몇 명의 관리들이 출입하고 있었고, 서리들이 분주히 서책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요?"
"규장각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대가 들어가면 더 이상한 시선을 받을 것이다."
소영은 아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김문수는 잠깐만 기다리라는 손짓을 남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겨진 소영은 규장각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아침 햇살이 기와지붕을 비추며 은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안에서 들려오는 종이 넘기는 소리와 붓으로 글씨 쓰는 소리가 평화롭기만 했다. 정조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말 괜찮을까?'
팔찌를 다시 한번 확인해보니 열기가 많이 식어 있었다. 그것이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 알 수 없어 더욱 불안했다.
한참을 기다리던 중, 김문수가 다른 관리 한 명과 함께 나타났다. 중년의 온화해 보이는 남자였다.
"아, 이분이 그 처녀인가?"
"예, 그렇습니다."
소영은 얼른 예를 갖춰 인사했다.
"전하의... 안위는 어떠신지요?"
김문수가 소영의 급한 질문에 눈을 찡그렸지만, 함께 온 관리가 먼저 대답했다.
"아침 일찍 문안을 드렸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정정하셨다. 오늘도 새벽부터 서책을 보고 계셨고."
소영의 굳어있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팔찌의 열기가 식은 것도 그래서였구나.
"다만..." 관리가 말을 이었다. "어제 저녁 늦게까지 신하들과 긴 회의를 하셨다고 들었다. 요즘 조정 일이 복잡해서 전하께서도 많이 피로해 보이시더라."
"어떤 회의였나요?"
소영의 질문에 김문수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너무 구체적으로 묻는 것 아니냐는 경고였다.
"그야... 국정 전반에 관한 일들이지. 처녀가 알 필요는 없는."
관리는 당황스러워하며 말을 흐렸다. 김문수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김 서리, 오늘 전하께서는 어떤 일정이 계시는가?"
"오전에는 서재에서 독서를 하실 예정이고, 오후에는 대신들과 만나실 것으로 알고 있다."
소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팔찌도 이제 거의 차가워져 있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안전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김 서리가 돌아간 후, 김문수는 소영을 조용한 곳으로 데려갔다.
"다행히 전하께서는 무사하시다. 그대의 걱정은 기우였던 모양이다."
"그런 것 같아요. 팔찌도 이제 거의 차갑거든요."
소영은 손목을 보여주었다. 정말로 은팔찌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온도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대는 안심하고..."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조심해야 해요."
소영이 김문수의 말을 끊었다.
"전하 주변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요. 특히 요즘같이 개혁 정책을 강하게 추진하실 때는 더욱 그래요."
김문수의 눈빛이 변했다.
"그대가 어떻게 전하의 정책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아는가?"
소영은 말을 멈췄다. 너무 많이 말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시골에서 온 처녀가 조정의 정책을 논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김문수의 목소리에 의심이 섞여 있었다. 소영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저는... 아버지께서 가끔 한양 소식을 들려주셔서..."
소영의 변명은 어색했다. 김문수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렇다면 그대 아버지는 조정 소식에 매우 밝으신 분이로군. 평범한 농부가 알기 어려운 내용들을..."
김문수는 소영을 규장각 깊숙한 서고로 이끌었다. 높다란 책장 사이로 먼지가 날리고, 오래된 책들의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곳은 아무도 엿들을 수 없는 은밀한 공간이었다.
"이제 솔직히 말해보시오. 그대는 도대체 누구인가?"
소영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정조의 안위가 걸린 일이었다.
"정말로 그냥... 들은 이야기일 뿐이에요. 전하께서 규장각을 설치하시고, 초계문신제를 만들어 인재를 등용하신다거나..."
"초계문신제?" 김문수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것은... 어떻게 그런 명칭을 아는가?"
소영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 그러니까... 제가 잘못 들었나 봐요."
"아니다." 김문수가 한걸음 다가섰다. "그대는 분명히 '초계문신제'라고 했다. 그 명칭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소영의 손바닥에 땀이 났다. 김문수의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좁은 서고 안에서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리고 홍국영에 대해서도 언급했지 않았는가? 그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는지 아는 것처럼..."
"홍국영이요?" 소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은... 전하의 총애를 받았지만 결국 권력을 남용해서 유배를 갔잖아요."
김문수는 완전히 말을 잃었다. 홍국영의 몰락은 겨우 몇 달 전의 일이었고, 그 자세한 경위는 조정 내부에서도 함구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대가... 어떻게 그것을..."
"모든 백성이 다 아는 일이 아닙니까?" 소영이 억지로 태연한 척했다. "홍국영이 전하를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다가 결국 발각된 거잖아요. 그래서 강진으로 유배를 간..."
"잠깐." 김문수가 손을 들어 소영의 말을 멈췄다. "강진이라고 했나?"
소영은 또다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홍국영의 유배지는 극비사항이었다.
"저는... 그냥..."
"그냥이 아니다." 김문수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홍국영의 유배지를 아는 사람은 조정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데 그대가 어떻게..."
서고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먼지 입자들이 석양빛 사이로 천천히 떨어졌다. 소영은 책장에 등을 기댄 채 김문수의 추궁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전하의 개혁 정책에 대해서도... 그대는 마치 조정 내부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김문수가 소영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눈빛에는 의심과 함께 묘한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균역법 개정, 신해통공, 서얼 차별 완화..." 김문수가 하나씩 손가락을 꼽았다. "이 모든 것들을 그대는 마치 직접 보고 들은 것처럼 정확히 알고 있다."
소영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21세기의 역사 지식이 18세기에서는 이렇게 위험한 것이 될 줄 몰랐다.
"저는 정말..."
"그리고 전하 주변의 위험에 대해서도 그렇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김문수의 시선이 소영의 손목으로 향했다. "그 팔찌와 함께 말이다."
소영은 무의식적으로 손목을 감쌌다. 은팔찌가 여전히 따뜻한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대는 누구인가?"
소영의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들었다. 김문수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을 해부하는 것 같았다. 그가 알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나열할 때마다, 소영은 자신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깨달았다.
"밖으로 나가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소영이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여기서는..."
김문수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고를 나와 규장각 뜰로 향했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어와 소영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답답한 서고에서 나와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이제 말해보시오." 김문수가 뜰 한가운데 서서 팔짱을 꼈다. "그대의 정체를."
소영은 마당의 돌계단에 앉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저는... 정말 평범한 사람입니다." 소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전하께서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에요."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김문수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증거도 없이."
소영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은팔찌가 손목에서 따끈하게 맥동했다. 그녀는 역사책에서 본 정조의 최후를 떠올렸다. 갑작스러운 병, 의문스러운 죽음,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정치적 음모들.
"홍국영이 몰락한 뒤에도 그의 잔당들이 남아있어요." 소영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전하의 개혁에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서얼 차별 완화와 상공업 진흥책은..."
"그런 것들은 조정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다." 김문수가 차갑게 끊어 말했다. "문제는 그대가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아느냐는 것이다."
소영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답답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역사책에서 배운 지식이라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제발 믿어주세요." 소영이 일어서서 김문수에게 다가갔다. "전하께서 정말 위험합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앞으로 무엇이 일어난다는 것인가?" 김문수의 눈이 번뜩였다. "그대는 마치 미래를 내다보는 것처럼 말한다."
소영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김문수의 말이 너무도 정확한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저는 그냥 느낌이 좋지 않을 뿐이에요." 소영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전하 주변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요."
"느낌?" 김문수가 비웃듯 중얼거렸다. "그대는 지금까지 구체적인 사실들을 나열해놓고는 이제 와서 느낌이라고 말하는가?"
바람이 더 세게 불어왔다. 소영의 치마자락이 펄럭였다. 그녀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떨었다. 추위 때문인지, 좌절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뭘 어떻게 말해야 선생님께서 믿어주실 건가요?"
김문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소영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속에는 의심과 함께 묘한 동요가 섞여 있었다.
소영은 돌계단에 다시 주저앉았다. 소영은 돌계단에 다시 주저앉았다. 어깨가 무겁게 처져 내렸다. 정조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은 간절했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김문수를 설득할 수 없었다. 역사적 지식은 오히려 독이 되어 자신을 의심스러운 존재로 만들 뿐이었다.
"전하께서 위험하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소영이 마지막으로 간청했다. "제발...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살펴봐 주세요."
석양이 더욱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규장각 뜰에는 길어진 그림자들이 드리워져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무겁게 흘렀다.
김문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석양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며 날카로운 그림자를 만들었다. 소영은 그의 표정에서 뭔가 달라진 것을 감지했다.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대는..." 김문수가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 그는 소영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니, 이상하다. 처음부터 이상했다."
소영의 심장이 빨라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치마를 움켜쥐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처녀가 어찌 정조의 개혁 정책을 그리 자세히 아는가? 홍국영의 과거 행적까지?" 김문수가 일어서며 소영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더욱이 전하의 안위를 그토록 염려하다니."
"그건..." 소영이 말을 더듬었다.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대의 말투가 어딘가 어색했다. 분명 교육받은 티가 났는데, 시골 처녀라고 하니 이상했다." 김문수의 목소리에 날이 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그 놀라운 지식들."
소영은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이미 돌계단 끝에 앉아 있어 갈 곳이 없었다. 김문수의 시선이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그대가 보이는 절박함이다." 김문수가 계속했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은..."
"아닙니다." 소영이 급하게 손을 저었다. "저는 정말..."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김문수가 소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시골 처녀가 궁중 사정을 그리 잘 알 리 없고, 전하의 안위를 그토록 걱정할 이유도 없다."
소영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김문수의 날카로운 눈빛을 피하려 했지만 시선이 자꾸 마주쳤다. 그의 눈에는 의심과 함께 묘한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혹시..." 김문수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대는 누군가의 첩자인가?"
"첩자요?" 소영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니면 다른 세력에서 파견된..." 김문수가 말을 멈췄다. 그는 소영의 표정을 살폈다. 진짜 놀란 것 같았다. "아니다. 첩자라면 이렇게 서툴지 않을 것이다."
바람이 더욱 차갑게 불어왔다. 소영은 몸을 떨었다. 추위보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김문수의 추궁이 점점 예리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김문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그대는 왕실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소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지만 김문수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구나." 김문수의 목소리에 확신이 서렸다. "왕실... 아니면 궁중과 연결된 누군가다."
"아닙니다!" 소영이 벌떡 일어섰다. "저는 정말 그냥..."
"그냥 뭔가?" 김문수도 일어서며 물었다. "그냥 우연히 이곳에 왔고, 그냥 우연히 전하의 안위를 걱정하고, 그냥 우연히 정조의 정책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인가?"
소영은 말문이 막혔다. 어떤 변명도 설득력이 없을 것 같았다. 김문수의 논리는 너무나 정확했다.
"도대체 그대는 누구인가?" 김문수가 한 걸음 더 다가오며 직접적으로 물었다.
소영은 그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 눈빛에는 의심과 호기심, 그리고 묘한 끌림까지 섞여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떨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전하께서 급히 어지러우시다!"
규장각 밖에서 급한 발걸음과 함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은팔찌의 경고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김문수는 외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소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충격과 의심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