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낯선 세계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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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은 책장 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심장이 귓가에서 북처럼 울렸고, 자신의 숨소리마저 너무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혔다.
"수상한 자라니요?" 김문수의 목소리가 평온했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 혹시 착각이 아닐까 하오?"
박 참판이 서재 안을 둘러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소영은 몸을 더욱 웅크렸다. 책등들이 등을 눌렀고, 먼지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렇다면 이 어수선한 모습은 무엇이오?" 박 참판의 목소리가 의심스러웠다.
"아, 그것 말이오." 김문수가 가벼운 웃음을 섞어 말했다. "급히 찾던 문서가 있어서 조금 뒤져보았소. 정리하려던 참이었는데."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김문수가 서류들을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박 참판,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이리 오셨소?"
"궁궐 경비가 수상한 인물을 목격했다고 하오. 검은 옷을 입고 기이한 모습이었다고..." 박 참판이 말하다가 멈췄다. "김 대령도 혹시 그런 자를 보지 못했소?"
소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검은 옷. 자신의 정장 차림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전혀 보지 못했소." 김문수의 답변이 즉각 나왔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만약 그런 자가 있었다면 내가 놓칠 리 없지 않겠소?"
침묵이 흘렀다. 박 참판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박 참판이 말하려던 순간, 복도에서 또 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참판님!" 누군가 급하게 외쳤다. "동궁 쪽에서 수상한 그림자를 봤다고 합니다!"
박 참판이 혀를 찼다. "동궁 쪽이라고? 그렇다면 여기가 아니군."
"그런 것 같소." 김문수가 동조했다. "나도 함께 가서 도움이 되겠소."
"아니오, 김 대령은 여기서 계속 문서 작업을 하시오. 우리가 처리하겠소."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복도의 소음도 점차 사라졌다.
한참을 기다린 후, 김문수가 조용히 말했다.
"나왔소."
소영이 떨리는 다리로 책장 뒤에서 나왔다. 촛불 빛에 김문수의 얼굴이 비쳤는데, 그는 의외로 침착해 보였다.
"고맙습니다." 소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안전하지 않소." 김문수가 고개를 저었다. "곧 다시 돌아올 것이오. 그전에 당신을 숨길 곳을 찾아야 하오."
"저를... 왜 도와주시는 거죠?"
김문수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르겠소. 아마도..." 그가 잠깐 망설였다. "당신이 말한 것들이 완전히 거짓은 아닌 것 같아서일 것이오."
소영이 눈이 커지며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믿으시는 건가요?"
"믿는다기보다는..." 김문수가 신중하게 말했다. "당신이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오. 그 옷차림도 그렇고, 말투도... 그리고 경신년 이야기를 했을 때 당신의 표정을 봤소."
그가 소영에게 다가섰다.
"지금은 자세한 설명보다 당신을 안전한 곳에 숨기는 것이 급선무요. 다행히 방법이 하나 있소."
"무슨 방법인가요?"
"당신을 내 먼 친척으로 만드는 것이오." 김문수가 진지하게 말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친척 처녀가 궁중에 하녀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하면 되오."
소영이 눈을 크게 떴다. "하녀요?"
"다른 방법이 없소. 궁 안에서 정체를 숨기고 지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오. 게다가..." 그가 잠깐 머뭇거렸다. "당신이 말한 위험이 정말이라면, 궁 안에 있는 것이 오히려 안전할 수도 있소."
복도에서 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김문수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지금 결정하시오. 다른 선택은 없소."
소영은 잠깐 망설였다. 하녀라니. 21세기 박물관 연구원이 조선시대 궁녀가 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다른 대안은 없었다.
"알겠소."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문수가 어깨에서 힘이 빠지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좋소. 그럼 지금부터 당신은 내 고향 친척 처녀 소영이오.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어 나를 찾아온 것이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인 것 같았다.
"기억하시오." 김문수가 급히 속삭였다. "절대 현대 이야기는 하지 마시오. 그리고 말투도 조심하시오."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박 참판과 함께 더 많은 병사들이 들어왔다.
"김 대령, 아직도 여기 계시는군요." 박 참판의 목소리에 의심이 더 짙어졌다.
"예, 아직 정리할 것이 남아서..." 김문수가 자연스럽게 대답하다가 소영을 돌아보았다. "아, 그런데 마침 친척 처녀가 찾아와서..."
모든 시선이 소영에게 쏠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소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박 참판과 병사들의 시선이 그녀를 훑어보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으로는 고요한 체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더 이상 부정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것이 현실이라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소영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작게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박 참판이 몇 초간 그녀를 지켜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궁녀 수업을 받도록 하시오. 김 대령, 책임지고 관리하시오."
"그리하겠나이다." 김문수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병사들이 물러나고 문이 닫히자, 소영은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오." 김문수가 말했다. "하루 종일 배워야 할 것이 많소."
***
아침 햇살이 창문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 소영은 김문수가 가져온 옷가지들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얀 저고리와 연한 분홍빛 치마, 그리고 각종 머리 장신구들이 작은 상자에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먼저 옷부터 갈아입으시오." 김문수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궁중 하녀의 복장은 엄격한 규정이 있소."
소영은 조심스럽게 저고리를 들어 올렸다. 명주 천이 손끝에서 물처럼 흘러내렸다. 박물관 유리관 너머로만 보던 것들이 이제 그녀의 살갗에 닿으려 하고 있었다. 가슴 한편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한편에서는 기묘한 떨림이 일었다.
옷을 갈아입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저고리의 끈을 어떻게 매는지, 치마는 어느 정도 높이로 올려야 하는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 김문수가 등을 돌린 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지만, 소영의 손은 자꾸 헤맸다.
"아니오, 그렇게 하면 안 되오." 김문수가 답답한 듯 말했다. "저고리 끈은 먼저 안쪽 것을 매고, 그다음에..."
"이렇게요?" 소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그래도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일단은 그런 대로 되었소."
거울을 보니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현대적인 헤어스타일이 한복과 어울리지 않아 어색했지만, 그래도 조선시대 여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이제 머리를 정리해야 하오." 김문수가 나무 빗을 건네며 말했다. "궁녀는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넘겨 묶어야 하오."
빗의 차가운 나무 질감이 손바닥에 닿았다. 소영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묶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현대의 고무줄이나 핀이 없으니 머리카락이 자꾸 흘러내렸다.
"참 서투르시는군." 김문수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어디서 자랐기에 이런 것도 모르시오?"
소영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시골에서... 그냥 아무렇게나 지냈어요."
"아무렇게나라..." 김문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도 처녀가 머리 묶는 법을 모른다는 것은..."
"가르쳐 주세요." 소영이 급히 말을 끊었다. "열심히 배우겠어요."
김문수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 천천히 배우면 되오. 다행히 하루는 있으니까."
그는 인센스를 피웠다. 은은한 향이 방 안에 퍼지면서 소영의 마음도 조금씩 진정되었다. 이상하게도, 이 모든 상황이 꿈 같으면서도 점점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제 걸음걸이를 배워보시오." 김문수가 일어서며 말했다. "궁중에서는 함부로 걸어서는 안 되오. 항상 단정하고 조용하게."
소영은 그의 시범을 따라 해보았다. 작은 보폭으로, 소리 나지 않게,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몇 번 반복하니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래, 그런 식이오. 그런데..." 김문수가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 "혹시 글은 아시오?"
"글이요?" 소영이 깜짝 놀랐다. 조선시대에 여자가 글을 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순간 깨달았다. "조금... 아주 조금만요."
"조금이라도 다행이오. 궁중에서는 가끔 글을 읽거나 써야 할 일이 있거든." 김문수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제 말투를 연습해보시오. 아까부터 계속 '요'를 붙이시는데, 궁중에서는 '예', '아니오'로 대답해야 하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평생 써온 말투를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이 쉬울 리 없었다. 자꾸 현대식 표현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예, 알겠습니다... 아니, 알겠소."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김문수가 작게 웃었다. "그래도 빨리 배우시는군. 하지만 더 조심해야 하오. 다른 궁녀들은 나보다 훨씬 예민할 테니까."
창밖으로 해가 높이 떠올랐다. 소영은 문득 자신이 정말로 200년 전 조선시대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더 이상 부정할 수도, 꿈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이것이 현실이라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응해야 했다.
"김... 김 대령님." 그녀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를 도와주셔서."
김문수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별말씀을. 이제 같은 편이니까."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기억하시오. 앞으로 더 어려운 일들이 많을 거요."
궁중 하녀 처소는 생각보다 넓었다. 솔잎을 깔아놓은 마루 위에 여러 개의 작은 방이 연결되어 있었고, 각 방마다 두세 명씩 머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소영은 김문수를 따라 복도를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벽에 걸린 등잔이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고, 어디선가 빨래하는 소리와 낮은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김문수가 한 방 앞에서 멈춰 섰다. "곧 다른 궁녀들이 올 테니 자연스럽게 행동하시오. 기억하시오, 당신은 내 먼 친척이고, 시골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문수는 발걸음을 돌렸다. 혼자 남겨진 소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찬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면서 긴장감이 더욱 선명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 끝에서 여러 명의 궁녀들이 나타났다. 모두 소영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고, 정갈하게 빗어 올린 머리와 단정한 치마저고리 차림이었다. 그들이 소영을 발견하고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새로 오신 분이시군요." 그 중 한 명이 다가와 말했다. 얼굴이 둥글고 눈가에 웃음기가 있는 궁녀였다. "저는 춘매라고 합니다. 어느 고을에서 오셨어요?"
"저는... 소영입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충청도 한산에서 왔습니다."
춘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시군요. 김 대령님께서 미리 말씀해주셨어요. 친척분이시라고 하시던데."
다른 궁녀들도 하나둘 가까이 왔다. 그들의 시선이 소영의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훑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소영은 무의식중에 어깨를 곧게 펴고 서 있다가, 김문수가 가르쳐준 대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처음이시니까 많이 어색하실 거예요." 춘매가 친근하게 말했다.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일단 오늘은 빨래 일부터 시작하시면 돼요."
소영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빨래라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궁녀들을 따라 처소 뒤편으로 나가자 큰 나무 통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차가운 물에 흰 옷가지들이 담겨 있었고, 비누 대신 쓰이는 듯한 잿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춘매가 시범을 보였다. 물에 적신 옷을 나무 방망이로 두드리며 때를 빼는 모습이었다. "너무 세게 하면 옷감이 상하니까 조심하세요."
소영이 따라 해보려고 했지만, 손이 물에 닿자마자 움찔했다. 물이 예상보다 훨씬 차가웠던 것이다. 겨울철 찬물에 손을 담그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인지 처음 알았다.
"괜찮으세요?" 춘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아니, 예. 괜찮습니다." 소영이 재빨리 대답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몇몇 궁녀들이 그녀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 궁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산에서 왔다고 하는데, 물이 찬 것도 모르나?"
소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이런 찬물에 익숙해야 했을 텐데, 자신의 반응은 너무 도시적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손을 물에 담그고 빨래를 시작했다.
한참 후, 춘매가 물 한 그릇을 가져왔다. "목이 마르실 테니 드세요."
소영은 감사하게 그릇을 받았다. 하지만 물을 마시려고 그릇을 입가로 가져가는 순간,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릇을 들어 올려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컵을 마시듯이.
조선시대 여성들은 그릇을 바닥에 놓고 몸을 숙여서 마셔야 했다. 그릇을 들어 올리는 것은 남성들의 방식이었다.
"어머..." 한 궁녀가 작게 감탄했다. "참 특이하게 드시네요."
소영의 손이 떨렸다. 그릇을 급히 내려놓으며 둘러보니, 모든 궁녀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함께 미묘한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죄송합니다." 소영이 작게 말했다. "고향에서는... 그냥 습관이..."
춘매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지방마다 다르니까요. 하지만 여기서는 조심하세요. 상궁님들이 보시면 혼나실 수도 있어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겨우 몇 분 만에 벌써 두 번이나 실수를 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점심이 끝나고 궁녀들이 각자의 일터로 흩어져 갈 때, 소영은 춘매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발걸음을 맞추려 애쓰면서도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방금 전 실수들이 계속 떠올랐다.
"소영아, 괜찮아?" 춘매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네... 아니, 예." 소영이 황급히 말을 고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춘매의 걸음이 멈췄다. "너 정말 어디서 왔다고 했지?"
"충청도... 충청도 홍주에서요." 소영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홍주?" 뒤에서 따라오던 다른 궁녀가 끼어들었다. "제가 홍주 출신인데, 거기서는 '네'라고 안 해요. '예'가 기본이거든요."
소영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김문수가 가르쳐준 것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네'는 현대어고 '예'가 조선시대 말이라고 했는데, 긴장하면 자꾸 잊어버렸다.
"아... 그게..." 소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아버님이 한양 말을 쓰라고 하셔서..."
"한양 말?" 춘매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양에서도 '예'라고 하는데?"
복도에 서 있던 다른 궁녀들도 하나둘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이 소영에게 집중되면서 공기가 무거워졌다. 소영은 목구멍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물을 따라주던 궁녀가 말했다. "아까 물 마시는 것도 이상했어. 그릇을 들어 올리고... 마치 남자처럼."
"맞아." 다른 궁녀가 맞장구쳤다. "그리고 걸을 때도 보니까 성큼성큼 걷더라고. 여자가 그렇게 걸으면 안 되는데."
소영이 자신의 걸음걸이를 돌아봤다. 평소 자신감 있게 걷던 습관이 여기서는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어깨를 쫙 펴고 턱을 들고 걷는 것이 현대에서는 당당해 보였지만, 조선시대 여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말할 때도..." 춘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뭔가 딱딱해. 마치 양반집 도련님처럼 말하는 것 같아."
소영의 입술에서 혈기가 사라졌다. 자신이 무의식중에 현대의 표준어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하층민 여성의 말투와는 거리가 멀었다.
"저... 저는..." 소영이 말을 더듬었다.
그때 복도 끝에서 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궁녀들! 뭘 하고 서 있는 거냐!"
궁녀들이 후다닥 흩어지면서 소영도 춘매를 따라 급히 걸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겨우 반나절 만에 이렇게 많은 의심을 받다니.
빨래터로 향하는 길에 춘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영아,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그런데 정말 조심해야 해. 여기는... 여기는 무서운 곳이거든."
"무서운 곳이요?"
"궁중에는 온갖 소문이 돌아. 조금만 이상해도 금세 퍼져. 그러면..." 춘매가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면 나쁜 일이 생길 수 있어."
소영의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김문수가 경고했던 것들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의 작은 실수 하나하나가 모두 위험 신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빨래터에 도착해서도 소영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다른 궁녀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려 했지만, 몸에 밴 현대인의 습관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빨래를 비비는 방식, 물을 뜨는 자세, 심지어 숨을 쉬는 것까지도 의식해야 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갈 무렵, 소영은 마침내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지 깨달았다. 단순히 과거로 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200년 동안 쌓인 문화와 언어, 행동 양식의 차이를 모두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
소영은 젖은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문수의 도움만으로는 부족했다. 이 낯선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을 완전히 바꿔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