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시간의 균열
약 18분 · 7,190자
어둠이 소영을 완전히 삼킨 순간, 세상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혈흔이 발하는 붉은 빛이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소영의 시야 끝에서 현실의 경계선들이 흐릿해지고, 연구실의 벽들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손목의 은팔찌는 이제 뜨겁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뜨거운 쇠가 살갗에 닿는 것 같았지만 화상은 입지 않았다. 오히려 온기가 혈관을 타고 퍼져나갔다. 대신 온몸으로 전해져 오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진동이었다.
"할머니..."
소영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것은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속삭임이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마지막 순간에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리 집안은 왕실과 인연이 깊다.' '팔찌가 길을 안내해줄 것이다.' 그때는 노인의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웅웅거리는 소음이 귓속에서 울려 퍼졌다. 소영은 양손으로 귀를 막았지만 소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하지만 이상했다. 연구실은 항상 깨끗하게 관리되는 곳이었는데.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미세한 진동이 섞여 나왔다. 혈흔의 붉은 빛이 점점 더 강렬해지면서, 마치 그 빛이 그녀의 의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현실감이 급속도로 사라져갔다. 발밑의 차가운 바닥이 느껴지지 않았고, 의자에 앉아 있다는 감각도 희미해졌다.
은팔찌가 갑자기 더욱 뜨거워졌다. 이번에는 정말로 화상을 입을 것 같은 열기였다. 소영은 반사적으로 팔찌를 빼려고 했지만, 마치 그녀의 손목에 용접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팔찌는 그녀의 맥박과 완전히 동조되어 박동하고 있었다.
"도와줘... 누군가 도와줘..."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입술이 벌어졌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도, 복도에서 들려오던 야간 경비원의 발걸음도, 심지어 자신의 숨소리조차 희미해져갔다.
그 순간, 혈흔이 마치 폭발하는 것처럼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소영의 시야가 완전히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현기증이 몰려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중력의 방향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위아래가 뒤바뀌고, 시간의 흐름마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은팔찌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이제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혈관을 따라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시간은 강물과 같단다. 때로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는 법이지.'
"이게 대체 무슨..."
소영의 말은 끝나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몰려온 극심한 현기증에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혈흔의 붉은 빛이 마치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며 자신을 빨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은팔찌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그녀의 손목을 더욱 꽉 조이는 느낌이었다.
의식이 완전히 사라져가는 순간, 소영은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이게... 당신이 말씀하신..."
그 후로는 오직 어둠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소영의 의식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마치 깊은 물속에서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눈꺼풀이 납덩이처럼 무거웠지만, 간신히 뜨자 낯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촛불이었다.
현대의 전등이 아닌, 진짜 촛불이 어둠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주황빛 불꽃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빛이 주변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소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온몸이 솜처럼 무력했다.
"여기가... 어디지?"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소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은 천장, 기둥을 따라 올라가는 단청의 붉은색과 푸른색이 촛불에 비쳐 일렁이고 있었다. 바닥은 차가운 마루였다. 손으로 만져보니 매끄럽게 다듬어진 나무의 결이 느껴졌다.
벽 한쪽에는 커다란 서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꽂힌 책들이... 소영의 눈이 커졌다. 전부 한지로 만든 고서들이었다. 선장본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책등에 붓글씨로 쓰인 제목들이 보였다.
'이상하다. 박물관인가? 아니면...'
소영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 순간 코끝으로 은은한 향이 스며들었다. 한지 특유의 부드러운 냄새와 먹의 깊은 향. 그리고 촛농이 타면서 나는 미묘한 냄새까지.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했다.
"꿈이야. 분명히 꿈일 거야."
소영은 자신의 뺨을 꼬집어보았다. 따가운 통증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대체 어디일까? 혈흔 묻은 고문서를 만진 후의 기억은 흐릿했다. 은팔찌가 뜨거워지고, 현기증이 몰려왔고, 그리고...
소영은 급히 자신의 손목을 살펴보았다. 할머니의 은팔찌가 여전히 거기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차갑고 평범해 보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기, 실례합니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소영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서재 입구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소영의 시선이 그의 옷차림에 고정되었다.
조선시대 관복이었다. 검은색 사모관대를 쓰고, 자주색 관복을 입은 남자가 촛대를 들고 서 있었다. 나이는 서른 정도로 보였고, 단정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당신은... 누구시오?"
남자의 말투도 조선시대 사극에서나 들을 법한 것이었다. 소영은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저는..." 소영은 말을 시작했다가 멈췄다. 자신의 목소리가 현대인의 그것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의식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차림도. 청바지와 니트, 운동화. 이 남자 눈에는 얼마나 이상해 보일까.
"기이한 차림새로군." 남자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리고 말씨도... 어느 나라 사람이오?"
소영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혈흔 묻은 고문서, 할머니의 은팔찌, 그리고 지금 이 조선시대 같은 곳. 할머니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시간은 강물과 같단다. 때로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는 법이지.'
"혹시..." 소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기가 어디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규장각이오." 남자가 대답했다. "창덕궁 규장각 서고 중 하나인데... 당신은 어떻게 여기에?"
규장각. 창덕궁. 소영의 입술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역사를 전공한 그녀가 모를 리 없는 곳이었다. 조선 정조 때 설치된 왕립 도서관이자 학술 기관. 그런데 지금 자신이 그곳에 있다는 것인가?
"지금이... 몇 년도죠?" 소영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기이한 질문이군." 남자의 눈이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정조 24년이오. 그런데 당신은 정말..."
정조 24년. 1800년. 소영의 다리에 힘이 빠졌다.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환상도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정말로 200년 전의 조선으로 와 있었다.
"역사적 근거를 봤을 때..." 소영이 중얼거리다가 멈췄다. "그런데 이런 일이 정말 가능한 건가요?"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할머니의 은팔찌가 촛불에 반짝였다. 이제야 할머니의 말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 오래된 이야기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전설들이 모두 진짜였던 것일까?
남자는 소영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떨리는 손,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헤매는 것이 연기가 아님을 직감했다.
"앉으시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리에 힘이 없어 보이는군."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앉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움직이는 것조차 두려웠다. 혹시 잘못 움직이면 이 환상이 깨져버릴까 봐, 아니면 더 끔찍한 현실과 마주하게 될까 봐.
"당신은..." 소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1800년에 살고 있는 사람인가요?"
"기묘한 질문이오." 남자의 미간이 좁혀졌다. "나는 김문수라 하오. 규장각 교리를 맡고 있소. 그런데 당신의 옷차림이며 말투가..." 그는 소영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소."
김문수. 그 이름이 소영의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건드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저는 한소영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2024년에서 왔어요."
김문수의 눈이 더욱 좁아졌다. "2024년이라... 무슨 말이오? 그런 연호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소영은 깨달았다. 이 시대 사람에게 서기 연도를 말한다고 해서 이해할 리가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는 왕의 재위년이 시간의 기준이었다.
"제가..." 소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미래에서 왔다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침묵이 흘렀다. 촛불이 흔들리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에 일렁이게 만들었다. 김문수는 한동안 소영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친 소리 같지만..."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의 옷을 보면 정말 이상하오. 이런 직물은 본 적이 없고, 신발도 그렇고... 그리고 머리 모양도."
소영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청바지와 운동화, 그리고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모습.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정말 기이하게 보일 것이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소영이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정말 미래에서 왔어요. 그 문서를 만지는 순간 여기로... 이 시대로 온 것 같아요."
"문서?" 김문수의 목소리에 긴장이 스며들었다. "무슨 문서 말이오?"
소영은 자신이 만졌던 혈흔 묻은 고문서를 떠올렸다. "피가 묻은... 한문으로 쓰여진 문서였어요. '왕이 위험하다'는 경고문이 적혀 있었고, 김문수라는 이름도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김문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피 묻은 문서라..." 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소영에게 다가왔다. "혹시 그 문서에 무엇이 쓰여 있었는지 기억하시오?"
"잘은 모르겠지만..." 소영이 기억을 더듬었다. "뭔가 위험한 계획에 관한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날짜가... 경신년이라고 되어 있었던 것 같고..."
경신년. 김문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바로 올해, 1800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어떤 계획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당신이 정말 미래에서 왔다면," 김문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시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소?"
소영은 잠깐 망설였다. 역사를 전공한 그녀가 모르는 것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함부로 미래의 일을 말해도 되는 것일까?
"저는... 역사학자예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시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갑자기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김문수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누군가 오고 있소." 그가 속삭였다. "이 시간에 규장각에 있을 사람은 없는데..."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곧이어 복도 끝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상한 자가 규장각에 침입했다! 모든 문을 봉쇄하라!"
김문수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그는 재빨리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복도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이런..." 그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알았을까?"
소영은 여전히 바닥에 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김문수의 긴장한 모습을 보니 상황의 심각성이 실감났다. 그녀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저 때문인가요?" 소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이 시대에 나타난 것이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건가요?"
김문수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촛불이 그의 얼굴에 요동치는 그림자를 만들었지만, 그의 눈빛은 의외로 차분했다. 마치 이런 상황에 익숙한 것처럼.
"전하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있는 몸이니, 당신을 지켜내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면 목숨을 걸겠소!"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정말 미래에서 왔든, 아니면 다른 곳에서 온 간첩이든... 지금 당장은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요."
간첩이라는 말에 소영의 눈이 커졌다. "간첩이라니요? 저는 정말..."
"쉿." 김문수가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복도의 소음이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소. 나를 믿고 따라오시오."
그는 소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고, 굳은살이 박인 것이 느껴졌다. 소영은 잠깐 망설였다. 이 낯선 남자를 믿어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그녀가 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하오." 김문수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규장각에는 비밀 통로가 있소. 그곳으로..."
갑자기 문 밖에서 더욱 큰 소리가 들려왔다.
"이 방이다! 촛불이 켜져 있다!"
김문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재빨리 소영의 손목을 잡고 서재 뒤편으로 이끌었다. 벽에 늘어선 책장 사이로 그들을 숨길 만한 공간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저기 뒤에 숨으시오." 그가 급히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소리 내지 마시오."
"그런데 당신은요?" 소영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김문수가 잠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묘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이 몸은 의로운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겠나이다. 전하의 뜻을 받들어 여기 있는 것이니 염려 마시오." 그가 말했다. "당신만 들키지 않으면 되오."
문 앞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릴 것 같았다.
"빨리!" 김문수가 재촉했다.
소영은 서둘러 책장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오래된 책들에서 나는 곰팡이 냄새와 먼지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김문수는 재빨리 자신의 옷매를 정리하고 책상 앞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마치 처음부터 혼자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갑옷을 입은 병사 두 명이 들어왔고, 그 뒤로 관복을 입은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김 대령!" 관복을 입은 남자가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이 시간에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시오?"
김문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전혀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도 없었다.
"아, 박 참판이시군요." 그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급히 확인해야 할 문서가 있어서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있었소."
박 참판이라 불린 남자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서재 안을 둘러보았다. 소영은 책장 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수상한 자가 규장각에 침입했다는 신고가 있었는데..." 박 참판이 말했다.
"수상한 자라니요?" 김문수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 혹시 착각이 아닐까요?"
복도에서 또 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심장 박동이 귓가에서 쿵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