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운명에 맞서다
약 24분 · 9,359자
부싯돌을 든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짚단 사이로 숨어든 후, 우회로를 통해 간신히 침전에 도착했을 때, 소영은 가슴을 짚으며 거친 숨을 고르려 애썼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있었다. 숨을 고르며 정조 앞에 무릎을 꿇자, 그의 시선이 소영을 꿰뚫었다. 홍국영은 소영이 도망쳤다가 돌아온 것을 의심스러워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고, 김문수는 여전히 긴장한 채 손을 칼자루에 올려두고 있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더 이상 거짓말할 수도 없었다.
"전하." 소영이 목소리가 갈라지며 말했다. "저는 한소영입니다. 2024년, 서기 이천이십사년에서 온 사람입니다."
침전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촛불마저 흔들림을 멈춘 듯했다.
"21세기에서 저는 응급의학과 의사였습니다. 그곳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읽었고, 전하께서 정조 24년, 서기 1800년에 홍국영의 독에 의해 승하하신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홍국영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미친 소리를..."
"조용히 하라." 정조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의 눈이 소영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계속하거라."
소영은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이제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전하께서는 홍국영이 올린 차를 드신 후 복통을 호소하시며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어의들은 급체라고 진단했지만, 실제로는 아편 계열의 독이었습니다. 홍국영은 전하가 승하한 후 왕세자를 옹립하되 자신이 섭정하려 했습니다."
홍국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 여자가 무슨..."
"전하께서 승하하신 후, 홍국영은 김문수를 비롯한 모든 반대파를 숙청할 계획이었습니다. 홍국영이 은밀히 작성한 계획서가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전하의 독살 방법과 후계 계획이 담긴 문서 말입니다."
정조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의 시선이 소영에게서 홍국영으로 향했다.
"그 문서를 보았다는 것이냐?"
"예, 전하. 독을 제조하는 방법, 투여 시점, 그리고 후계 계획까지. 모든 것이 홍국영의 친필로 적혀 있었습니다."
홍국영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거짓말이다! 이 여자는 미쳤습니다, 전하! 미래에서 왔다니, 그런 허황된 말을 어찌 믿으시겠습니까!"
소영은 정조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제 마지막 카드를 꺼낼 때였다.
"전하, 그렇다면 제가 미래의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영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사라졌다. "내년, 정조 25년에 전하께서는 수원 화성 건설을 완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정조 26년에는 러시아 사신이 조선을 방문할 것입니다."
정조의 눈이 커졌다. 화성 건설은 극비 사항이었고, 러시아와의 외교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제 밤 꿈에서 사도세자를 보셨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전하께 '백성을 위한 왕이 되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정조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그 꿈은 정말로 어제 밤 꾸었던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것을..."
"저는 정말로 미래에서 왔습니다, 전하. 그리고 전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에 왔습니다."
홍국영이 뒤로 물러섰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고,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 이럴 수는 없다. 미래에서 온다니, 그런 일이 있을 리가..."
김문수가 소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커졌다가 천천히 가늘어졌다. 마치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의 답을 찾은 사람처럼. 이해의 빛이었을까. 아니면 받아들임의 표시였을까.
정조가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나에게 준 약은?"
"21세기의 해독제입니다, 전하. 아편 중독을 치료하는 약입니다. 전하의 몸에서 독이 빠져나가고 계십니다."
정조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확실히 떨림이 멈춰가고 있었고, 시야도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홍국영." 정조의 목소리에 얼음같은 차가움이 실렸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냐?"
홍국영이 무릎을 꿇었다. "전하, 이 여자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미래에서 왔다는 것은 허황된 소리이고..."
"그렇다면 네가 나에게 올린 차에는 무엇이 들어있었느냐?"
침묵이 흘렀다. 홍국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소영은 정조께 고개를 숙였다. "전하, 이제 모든 진실을 아셨습니다. 홍국영을 체포하시고, 그의 모든 공모자들을 밝혀내십시오."
정조가 김문수를 바라봤다. "김문수, 네 생각은 어떠하냐?"
김문수가 칼을 칼집에 넣으며 말했다. "전하, 소영... 한소영이 말하는 모든 것이 사실입니다. 저 역시 홍국영의 음모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홍국영이 갑자기 일어섰다. 그의 손에 비수가 번쩍였다.
"전하를 해치려는 자, 이 김문수가 용납하지 않겠나이다!"
"전하, 제가 진실로 미래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하겠습니다."
소영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정조의 눈빛이 의심과 호기심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홍국영은 여전히 나를 미친 궁녀로 몰아가려 하고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정확히 언제, 무엇이 일어날지를."
정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말해보아라."
소영은 가슴을 깊게 부풀렸다. 역사책에서 외웠던, 그 차가운 글자들이 이제는 살아있는 현실이 되어 소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올해 겨울, 전하께서는 수원 화성 건설을 명하실 것입니다. 그곳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시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실 것입니다." 정조의 눈이 커졌다. "내년 봄에는 규장각을 더욱 확대하시어 서얼 출신 인재들을 대거 등용하실 것이고, 그 중에는 박제가와 이덕무가 있을 것입니다."
정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것들은 그가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마음속 깊이 품고만 있던 계획들이었다.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앞으로 신해통공을 실시하시어 상업을 진흥시키실 것이고, 화성성역의궤라는 기록을 남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잠시 망설였다. "임오년, 전하께서는 갑작스럽게 승하하실 것입니다. 바로 홍국영과 같은 자들의 독 때문에."
정조가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알 수 있느냐?"
홍국영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전하! 이 여자는 분명 누군가와 결탁하여 전하의 은밀한 계획들을 엿들었을 것입니다! 미래에서 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정조는 더 이상 홍국영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말한 임오년... 그것은 언제냐?"
"지금으로부터 24년 후입니다, 전하."
정조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독이 빠져나가면서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손을. "네가 가져온 해독제가 실제로 나를 살렸다. 그리고 네가 말한 것들은..."
"전하!" 홍국영의 목소리가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여자의 요술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분명 어떤 사술을 부린 것입니다!"
소영은 홍국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홍국영,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전하께 올린 차에 든 독은 비상입니다. 당신의 소매 안쪽에 아직 그 가루가 남아있을 것입니다."
홍국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소매를 만졌다가,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는 황급히 손을 뗐다.
정조가 날카롭게 말했다. "홍국영, 소매를 걷어라."
"전하, 이것은..."
"명이다!"
침전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멀리서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며 그림자들을 벽에 춤추게 했다.
홍국영의 손이 천천히 소매로 향했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 마지막 도박을 하는 자의 광기가 번뜻였다.
그때였다.
김문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확고했고, 어깨는 곧게 펴져 있었다. 촛불이 그의 얼굴을 비추자 나는 그 눈빛에서 무언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소영."
그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그 목소리에는 이전과는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마치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을 말하려는 사람의 음성이었다.
"소영이라 하셨소. 그대가 어디서 왔든 상관없소. 나는 네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홍국영이 그를 노려봤다. "김문수, 너까지 이 여자의 사술에 넘어간 것이냐?"
김문수는 홍국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이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사술?" 김문수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홍국영, 진짜 사술은 당신이 부리고 있는 것 아니오? 충신의 탈을 쓰고 주군을 독살하려 한 것 말이오."
나는 김문수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소영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가슴팍을 짚었다. 김문수가 완전히 내 편이 되어주었다는 것이, 내가 말한 모든 것을 믿어주었다는 것이 소영은 잠시 멍하니 김문수를 바라보았다.
홍국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김문수, 너는 지금 역적의 편에 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역적은 당신이오, 홍국영."
김문수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한 걸음 더 다가가며 홍국영과 나 사이에 섰다. 마치 나를 보호하려는 듯이.
"나는 이 여자를... 소영을 믿소.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그녀가 전하를 구하려는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소."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소영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술을 꽉 다물었다. 무언가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삼켜야 했다. 김문수는 정말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겪은 고통을, 내가 품은 절망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정조를 구하려 한 마음을.
홍국영이 뒷걸음질 쳤다. 그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렇다면..." 그가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말이냐?"
정조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해독제가 효과를 보이고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홍국영, 너는..."
그 순간이었다.
홍국영의 손에서 차가운 금속의 번득임이 일어났다. 칼날이 촛불에 반사되며 섬뜩한 빛을 뿜어냈다. 그는 검을 뽑으며 나를 향해 돌진했다.
"그렇다면 증인을 없애는 수밖에!"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홍국영의 검이 내 가슴을 향해 날아왔고, 나는 그 차가운 죽음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
하지만 그 검날이 내게 닿기 전에, 김문수가 소영의 앞으로 몸을 던졌다.
"소영!"
그의 외침과 함께 두 검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침전을 가득 채웠다. 김문수는 어느새 자신의 검을 뽑아 홍국영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밀어내며 떨어졌다. 홍국영의 얼굴에는 광기와 절망이 뒤섞여 있었고, 김문수의 눈에는 차가운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홍국영." 김문수가 검을 겨누며 말했다. "이제 정말로 끝이오."
홍국영이 비웃었다. "홍국영 대감, 이제 그만하시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오."
그가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김문수를 향해서였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봤다.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김문수가 다칠까 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까 봐 소영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하지만 김문수의 검술은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는 홍국영의 공격을 막아내며 차근차근 상대의 빈틈을 노렸다. 두 검이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고, 그들의 발걸음이 마루바닥을 울렸다.
정조가 침상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만하라! 홍국영!"
하지만 홍국영은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마지막 발악을 하듯 김문수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김문수의 검이 홍국영의 손목을 스쳤다. 홍국영이 아픔에 신음하며 검을 떨어뜨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가 침전 안에 메아리쳤다. 홍국영이 손목을 움켜쥔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손목을 움켜쥔 채 고통스러워했다.
"끝났다." 김문수가 검끝을 홍국영의 목에 댔다. "더 이상 움직이지 마시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품에서 해독제가 든 작은 병을 꺼내며 정조에게 달려갔다. 전하의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독이 이미 상당히 퍼진 것 같았다.
"전하, 이것을 드셔야 합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병마개를 열었다. "해독제입니다."
정조가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남아 있었지만, 동시에 희미한 신뢰도 보였다.
"정말로... 너는 미래에서 왔다는 것이냐?"
"지금은 그것보다 이 약이 더 중요합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제발, 전하. 시간이 없습니다."
정조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해독제를 그의 입에 부었다. 쓴맛 때문인지 그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끝까지 삼켜주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홍국영이 갑자기 소리쳤다. 그가 왼손으로 품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들었다. 상처 입은 오른손으로는 검을 들 수 없었지만, 왼손으로도 충분히 위험했다.
김문수가 몸을 돌렸지만, 홍국영은 이미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소영!"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홍국영의 단검이 내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날카로운 날이 내 팔을 스쳤고, 뜨거운 고통이 퍼졌다.
하지만 김문수가 더 빨랐다. 그가 홍국영의 등 뒤로 다가가 검자루로 그의 목덜미를 내려쳤다. 홍국영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이제 정말로 끝이오." 김문수가 숨을 거칠게 내쉬며 말했다.
나는 팔의 상처를 움켜쥔 채 정조를 살폈다. 해독제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의 안색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고, 호흡도 안정되고 있었다.
"전하, 기분이 어떠신지요?"
정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의식은 또렷해 보였다.
"이상하게도...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구나." 그가 나를 바라봤다. "정말로 네가 내 목숨을 구한 것이냐?"
"네, 전하."
정조가 홍국영을 내려다봤다. 그는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피가 그의 손목에서 계속 흘러나왔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홍국영..." 정조의 목소리에는 배신감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진정 네가 나를 죽이려 했단 말이냐?"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홍국영 대감이 차려 온 음식에 독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독은..."
"아관파천 이후 고종황제를 독살하려 했던 바로 그 독과 같은 것입니다."
정조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그것을..."
"제가 미래에서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역사서에 기록된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김문수가 내 옆으로 다가와 상처 난 팔을 살폈다. "깊지 않으니 다행이오. 하지만 치료가 필요하겠소."
나는 그의 따뜻한 손길에 위안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조를 다시 바라봤다.
"전하, 이제 홍국영 대감을 어떻게 하실 건지요?"
정조가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내시들을 불러라. 홍국영을 의금부로 압송하도록 하겠다."
"네, 전하."
김문수가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정조가 그를 불렀다.
"김문수."
"네, 전하."
"네가 진정으로... 과인을 위해 목숨을 걸었구나."
김문수가 깊이 절했다. "전하를 모시는 것이 소신의 본분입니다."
정조가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너는... 정말로 미래에서 온 것이냐?"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을 말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네, 전하. 저는 21세기에서 왔습니다. 전하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요."
정조의 눈이 커졌다. "21세기라 하니... 그 먼 훗날의 일을 어찌 알 수 있단 말이냐."
"전하께서는 조선의 가장 훌륭한 왕 중 한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에서는 전하께서 홍국영의 독에 의해 승하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역사가 바뀐 것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이제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정조의 말이 끝나자 침전 안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승리의 순간이었지만, 내 가슴 어딘가에서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마치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하, 이제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김문수가 깊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고, 긴장으로 굳어있던 턱선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왜인지 그 평온함을 함께 느낄 수 없었다.
정조가 천천히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갔다. 새벽 햇살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21세기..." 정조가 중얼거렸다. "그 시대는 어떠한가?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나는 잠시 망설였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현대의 복잡한 현실을, 여전히 존재하는 불평등과 갈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전하께서 꿈꾸셨던 세상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고, 신분에 관계없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정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때였다. 내 손끝이 이상하게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시 저린 것인 줄 알았는데, 점점 그 느낌이 강해졌다. 손을 들어 보니 손가락 끝이 희미하게 투명해지고 있었다.
"이게 뭐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김문수가 돌아봤다. 그의 눈이 내 손을 보고 순간 커졌다.
"소영아, 네 손이..."
나는 급히 두 손을 번갈아 보았다. 투명해지는 현상이 점점 팔로 번져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물에 녹는 설탕처럼, 내 존재 자체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김문수가 급히 내게 달려와 내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내 손을 통과해버렸다. 마치 내가 공기처럼 되어버린 것 같았다.
"소영아!"
김문수의 외침이 침전을 울렸다. 정조도 놀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역사를 바꾼 대가. 내가 이 시대에 속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 정조를 구하고 역사를 바꾼 순간, 나는 이곳에서 사라져야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문수야..."
내 목소리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김문수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은 계속해서 내 몸을 통과할 뿐이었다.
"가지 마, 소영아. 제발 가지 마."
"나도... 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게 운명인가 봐."
투명해지는 것이 이제 내 가슴까지 올라왔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나는 김문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문수야, 고마웠어. 너를 만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
"소영아..."
"전하를 잘 모셔. 그리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
김문수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의 어깨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랑해, 문수야. 어떤 시간 속에서도... 널 사랑할 거야."
내 마지막 말이 침전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소영의 모든 존재가 아침 햇살 속으로 사라져갔다.
김문수가 무릎을 꿇고 앉아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소영이 있던 자리를 더듬었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따스한 햇살만이 마루바닥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