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폭로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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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의 칼날이 내 목을 향해 번개처럼 내려꽂혔다.
"죽어라, 요괴!"
그의 광기 어린 외침이 침전을 가득 채웠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지만, 칼끝이 내 목덜미를 스쳤다. 따가운 통증과 함께 따뜜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감히!"
천둥같은 음성이 침전을 뒤흔들었다. 정조였다. 그가 침상에서 일어나 홍국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주먹이 떨리며 쥐어져 있었다.
"전하, 전하께서 깨어나셨습니까!"
홍국영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홍국영,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정조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촛불이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이 여자는... 이 여자는 요괴입니다! 전하를 홀린..."
"그만!"
정조가 손을 들어 홍국영의 말을 막았다. 그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나는 목을 짚고 있는 손에서 피가 새어나오는 것을 느꼈지만,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소영아."
정조가 나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네, 전하."
"네가 말한 것들... 수원 화성, 러시아 사신, 그리고 나의 은밀한 꿈까지. 그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조가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불안정했지만,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그리고 홍국영, 네가 준 약에서 이상한 맛을 느꼈을 때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네가 나의 가장 가까운 신하였기에."
홍국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전하, 그것은..."
"조용히 하라."
정조의 명령에 홍국영이 입을 다물었다. 정조가 김문수를 바라봤다.
"김문수, 네가 가져온 증거들을 보았다. 홍국영의 사저에서 발견한 문서들 말이다."
김문수가 무릎을 꿇었다.
"전하, 신은..."
"일어나라. 너는 목숨을 걸고 나를 구하려 했다. 그리고 이 여인도."
정조의 시선이 다시 내게 향했다.
"소영아, 네가 미래에서 왔다는 말... 이제 믿는다."
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정조가 나를 믿어주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네가 말한 예언들이 모두 적중했고, 네가 보여준 의술은 이 시대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조가 잠깐 말을 멈췄다. 그의 눈에 깊은 성찰이 스며들었다.
"네가 목숨을 걸고 나를 구하려 했다. 만약 네가 정말로 요괴라면, 왜 그런 일을 했겠느냐?"
홍국영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칼을 들어올렸다.
"전하, 속으시면 안 됩니다! 이자들은 모두 역적입니다!"
"홍국영!"
정조의 목소리가 침전을 진동시켰다.
"역적은 바로 너다. 너의 모든 음모가 드러났다. 독 제조, 후계 계획, 그리고 나를 독살하려던 시도까지."
홍국영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쨍그랑하는 금속음이 적막을 깨뜨렸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정조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한 나라의 군주로서의 위엄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김문수."
"예, 전하."
"홍국영을 체포하라. 그리고 그의 모든 음모 문서들을 조정에 공개하라."
김문수가 일어나 홍국영을 향해 다가갔다. 홍국영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그의 어깨가 무너져 내렸다.
정조가 내게 다가왔다. 그의 눈에는 깊은 감사가 담겨 있었다.
"소영아, 너는 이 나라의 은인이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죽었을 것이고, 조선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목이 메어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전하의 목숨을 구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정조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새로운 희망이 담겨 있었다.
"이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너희가 바꾼 역사가."
"전하, 잠깐만요!"
홍국영의 목소리가 침전을 가득 채웠다. 김문수의 손이 그의 팔을 잡으려던 순간, 홍국영이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저 여자를 보십시오! 저자가 바로 요괴입니다!"
정조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무슨 소리냐?"
"전하,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한 여자가 미래의 일을 그토록 정확히 알 수 있겠습니까?" 홍국영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저자는 분명 요괴입니다! 인간의 몸을 빌려 우리 조선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김문수가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입을 다물어라, 홍국영."
"아닙니다! 전하,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홍국영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절규했다. "저자가 나타난 후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저자는 분명 악귀입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홍국영의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이 시대 사람이 아니었고, 미래에서 온 존재였으니까.
정조가 천천히 홍국영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바닥에 울렸다.
"홍국영아."
정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네가 지금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느냐? 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요괴라고 부르는 것이냐?"
"전하,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저자의 요술에 넘어가서는—"
"조용히 하라!"
정조의 호통이 침전을 진동시켰다. 홍국영이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소영이가 예언한 것들을 떠올려보아라. 네가 독을 탈 것도, 네가 나를 죽이려 할 것도, 모두 적중하지 않았느냐?" 정조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 예언들이 모두 거짓이었다면, 지금 내가 여기 살아서 서 있을 수 있겠느냐?"
홍국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더군다나," 정조가 계속 말했다. "소영이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를 구했다. 요괴가 그런 일을 하겠느냐?"
"전하..."
"김문수, 이자를 끌고 나가라. 더 이상 들을 말이 없다."
김문수가 홍국영의 팔을 붙잡았다. 홍국영이 발버둥쳤지만 소용없었다.
"전하! 후회하실 겁니다! 저 요괴 때문에 조선이 망할 것입니다!"
홍국영의 절규가 복도로 멀어져갔다.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침전에 정적이 흘렀다.
정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끝났구나."
나는 그의 옆에 서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동쪽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전하, 홍국영의 말이..."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엇이냐?"
"저에 대한 말이요. 혹시 전하도..."
정조가 고개를 저었다. "소영아, 네가 어디서 왔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다."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는 이 나라를 구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김문수가 돌아왔다. 그의 어깨가 축 늘어졌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홍국영을 의금부에 넘겼습니다. 그리고 그의 저택에서 발견된 모든 문서들을 가져오라고 명했습니다."
"잘했다." 정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서들을 모두 조정에 공개하라. 홍국영의 음모가 얼마나 치밀했는지 모든 신하들이 알아야 한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정조가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새로운 결의가 서려 있었다.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야겠다. 홍국영 같은 간신들이 발붙일 수 없는 세상을."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내가 바꾼 역사가 이렇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 한편에서는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갑자기 손끝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새벽 공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가움이 점점 팔로, 어깨로 번져나갔다. 마치 얼음물에 천천히 잠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영아?" 김문수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얼굴이 왜 이렇게 하얗게..."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숨이 멎었다.
손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손가락 끝부터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었다. 마치 물에 젖은 먹물이 번지듯이, 내 존재 자체가 흐려지고 있었다.
"이게... 뭐지?"
김문수가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내 손을 통과하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이었다. 만져지는 것 같으면서도 만져지지 않는, 그런 느낌.
"소영!" 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
정조도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이 커졌다.
"이것은..."
공기가 윙윙거리기 시작했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작동하는 것 같았다. 공기 자체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역사를 바꾼 대가. 이것이 그 대가였다.
"아니야..." 내가 중얼거렸다. "아직 안 돼. 아직 할 일이 남았는데..."
하지만 투명해지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이제 손목까지 희미해졌다. 마치 아침 안개가 햇살에 녹아드는 것처럼.
김문수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내 몸을 통과해버렸다.
"소영! 소영!"
그의 목소리에 절망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내 팔이 그의 몸을 감쌀 수 없었다.
"괜찮아." 내가 말했다. 목소리마저 희미해지고 있었다. "괜찮다고..."
"그럴 리가 없나이다!" 김문수가 소리쳤다. "너를 잃을 수는 없어. 절대로!"
정조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경외감과 슬픔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소영, 너는..."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너는 정말로..."
"전하." 내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내 몸의 절반 이상이 투명해져 있었다. "부디 좋은 왕이 되세요. 백성들을 사랑하는 왕이."
"그럴 것이다." 정조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가 목숨을 걸고 지켜준 이 나라를, 나는 반드시 좋은 나라로 만들 것이다."
공기의 진동이 더욱 심해졌다. 침전 안의 모든 것들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촛불이 흔들리고, 병풍이 바스락거렸다.
나는 김문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문수야..."
"말하지 마." 그가 고개를 저었다. "작별 인사 같은 건 하지 마."
"하지만..."
"안 되나이다!" 그가 소리쳤다. "소영은 떠날 수 없나이다. 우리가... 우리가 아직..."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비록 만질 수는 없었지만, 그 마음만큼은 전하고 싶었다.
"고마웠어." 내가 속삭였다. "너를 만날 수 있어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갑자기, 내 주변에 작은 균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거울에 금이 가는 것처럼, 공간 자체에 선들이 그어지고 있었다.
시공간의 균열이었다.
균열들이 내 주위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유리창에 거미줄 같은 금이 퍼져나가듯, 현실 자체가 갈라지고 있었다. 그 틈새로 보이는 것은 어둠도 빛도 아닌, 형언할 수 없는 공허였다.
"소영아!" 김문수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잡아줘, 제발!"
나도 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이미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손끝이 내 손가락을 스쳐 지나갔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문수야." 내가 말했다. "들어줘."
"아니야, 말하지 마!" 그가 고개를 저었다. "너는 여기 있어야 해. 나와 함께..."
"들어줘." 나는 더 간절하게 말했다. 균열들이 더 넓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 생에서라도... 반드시 나를 찾아줘."
그의 눈이 더 크게 떨렸다.
"다음 생?"
"약속해줘." 내가 속삭였다. "어떤 모습이든, 어떤 시대든... 나를 찾아줘. 내가 너를 기다릴게."
김문수의 입술이 떨렸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펼쳤다가를 반복했다.
"약속한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천 번을 태어나도, 만 번을 윤회해도... 반드시 너를 찾겠다.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비록 그가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
"소영아, 그런데..." 그가 급하게 말했다. "어떻게 찾아? 어떻게 너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균열들이 내 몸의 절반을 감쌌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었다.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그에게 말했다.
"할머니의 일기를 찾아봐."
"할머니의 일기?"
"내 할머니... 아니, 내가 돌아가면..." 말이 점점 어려워졌다. 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일기를 봐. 거기에... 거기에 답이 있을 거야."
김문수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이야? 소영아, 무슨..."
"사랑해." 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정말... 정말 사랑해."
그 순간, 침전 안으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따스한 빛이 우리를 감쌌다. 그 빛 속에서 김문수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눈물, 그의 떨리는 입술, 그의 간절한 눈빛.
"나도 사랑해." 그가 속삭였다. "영원히... 영원히 사랑해."
균열이 내 전신을 감쌌다. 이제 나는 반쯤 이 세상에, 반쯤 저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김문수의 모습이 점점 흐려졌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선명하게 들렸다.
"기다려줘." 그가 외쳤다. "꼭 찾을게. 약속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할머니 일기에서... 기다릴게."
그 말과 함께, 나는 완전히 사라졌다.
침전 안에는 김문수 혼자만 남았다. 그는 한동안 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아침 햇살이 그 빈 공간을 비추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영아..." 그가 작은 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오직 아침 새들의 지저귐과 궁궐 안의 부산한 소음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김문수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서 있던 그 자리에 손을 올렸다. 바닥은 차갑고 딱딱했다.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할머니의 일기..." 그가 중얼거렸다. "무슨 뜻일까?"
눈을 떠보니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하얀 형광등이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고, 에어컨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연구실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꿈이었나?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내 옆에는 펼쳐놓고 보던 조선왕조실록 복사본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세 시. 점심시간에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았는데, 꿈치고는 너무나 생생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봤다. 뺨이 축축했다. 언제 울었나?
"김문수..." 그 이름이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가슴이 이상하게 아팠다. 마치 누군가와 영원히 헤어진 것 같은, 그런 공허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혼자 살고 있고, 특별히 그리워할 사람도 없었다.
휴게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는 몇 명의 학생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범했다. 방금 전까지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사무실로 돌아가 책상에 앉았다. 컴퓨터 모니터를 켜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확인했다. 새로 입수된 고문서 정리, 다음 주 특별전시 준비, 학술지 원고 마감...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할까?
서랍을 열어 개인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맨 아래 깊숙이 들어있던 낡은 상자를 발견했다. 할머니 유품이라고 적힌 라벨이 붙어 있었다. 언제 여기에 넣어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상자를 꺼내 열어봤다. 오래된 사진 몇 장과 함께 가죽으로 된 작은 일기장이 들어있었다. 할머니의 일기였다. 어릴 때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때는 한문과 한글이 섞여 있어서 제대로 읽지 못했었다.
지금이라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페이지를 펼쳤다. 할머니의 또박또박한 글씨가 보였다.
*정조 14년, 봄*
*오늘 또 그 꿈을 꾸었다. 궁궐에서 한 남자가 나를 부르는 꿈. 그는 나를 '소영'이라고 부른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손이 떨려서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그 남자의 이름은 김문수라고 했다. 나는 왜 그 이름을 들으면 가슴이 아플까?*
숨이 막혔다. 이럴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어떻게 그 이름을, 그 꿈을...
몇 페이지를 더 넘겼다.
*김문수는 나에게 약속했다고 했다. 다음 생에서라도 반드시 찾겠다고.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왜인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우리 집안 여자들은 대대로 이상한 꿈을 꾼다고. 전생의 기억일 수도 있다고.*
책장을 넘기는 손이 멈췄다. 그 다음 페이지에는 다른 필체로 쓰인 글이 있었다. 할머니 글씨가 아니었다. 더 남성적이고, 더 격정적인 글씨였다.
*소영아, 너를 기다렸다.*
*나는 김문수다. 네가 사라진 후 평생을 너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편지를 남긴다.*
*우리의 사랑은 시간을 초월한다. 언젠가 너는 이 글을 읽게 될 것이고, 그때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영원히 사랑한다.*
*- 김문수*
편지가 일기장에서 떨어져 바닥에 흩어졌다.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다. 정조, 홍국영, 그리고... 김문수.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지막 순간 나를 바라보던 그 절절한 눈빛. 영원히 찾겠다던 그 약속.
"김문수..." 나는 그 이름을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확신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