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진실의 파편들
약 25분 · 9,954자
소영은 홍국영의 조건을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날이 여전히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었지만, 칼날의 차가운 감촉이 목덜미에 닿았지만, 손끝의 떨림은 멈춰 있었다. 모든 것을 걸고 돌아온 이 순간, 더 이상 잃을 것은 없었다.
"시간을 주십시오. 해독제를 구해와야 합니다."
홍국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해독제라고?"
"예. 전하께서 드신 독은 아편 계열의 것으로 보입니다. 특별한 처방이 필요합니다."
"어디서 구해온다는 것이냐?"
소영은 잠시 망설였다. 너무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심받을 수 있었다.
"궁중 약방에 있는 재료들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홍국영은 한동안 소영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네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천천히 말했다. "너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구나. 좋다. 새벽까지 시간을 주겠다."
칼을 칼집에 넣으며 홍국영이 덧붙였다.
"하지만 기억해라. 실패하면 네 목숨은 없다. 그리고 혹시라도 도망치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내 사람들이 궁 곳곳을 지키고 있다."
소영이 깊이 절을 올렸다. "명심하겠습니다, 대감."
홍국영이 침전을 나서자, 소영은 정조의 침상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숨소리는 가늘었지만, 맥박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소영은 정조의 손을 잠시 잡았다. 차갑지만 완전히 식지는 않은 온기가 느껴졌다.
"전하,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제가 반드시 구해드리겠습니다."
침전을 나서며 소영은 마음속으로 계획을 세웠다. 먼저 해독제 재료를 구하고, 그 다음에는 김문수를 구출해야 했다. 혼자서는 홍국영의 음모를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김문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후원으로 향하는 길, 새벽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연못가를 지나던 소영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소영의 숨이 목구멍에서 막혔다. 어둠 속 그림자가 점점 선명해졌다. 홍국영이었다.
"어디 가는 길이냐?"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소영은 재빨리 머리를 숙였다. "약방으로 가는 길입니다, 대감."
"혼자서?"
"예. 너무 많은 사람이 알면 안 될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홍국영이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연못에서 피어오르는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그런데 너, 얼굴이 낯설구나. 어느 처소 소속이냐?"
소영의 등에 차가운 땀이 흘렀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줄 예상했어야 했다.
"저는... 상선원 소속입니다. 평소에는 궁 밖 일을 주로 맡아서 대감께서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상선원?" 홍국영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상선원에서 의원 일을 하는 궁녀가 있다고?"
소영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는 원래 의녀 출신입니다. 특별한 경우에만 궁중 치료를 돕고 있습니다."
홍국영이 한동안 소영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마치 그녀의 속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흥미롭군. 그렇다면 네가 정말로 전하를 구할 수 있다는 말이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다." 홍국영이 뒤돌아서며 말했다. "하지만 잊지 마라. 나는 네가 하는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다."
그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소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위기는 모면했지만 홍국영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계속 따라올 것 같았다.
연못가의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소영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의금부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새벽 안개 속에서 소영은 의녀 복장으로 갈아입고 몸을 웅크린 채 담장 그늘을 따라 움직였다. 홍국영이 떠난 지 한 시진도 되지 않았지만,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아직도 등줄기를 따라 내려오는 것만 같았다.
의금부 후문에 다다르자 파수꾼 두 명이 졸고 있었다. 소영은 조심스럽게 약낭을 들어 올리며 당당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누구냐!"
"의녀 한소영입니다. 급히 치료해야 할 죄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파수꾼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런 새벽에?"
"열병이 심해져서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상부에서 급히 부른 것입니다."
소영은 약낭에서 침통을 꺼내 보였다. 파수꾼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지하로 내려가시오. 간수에게 말하면 안내해 줄 것입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축축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썩은 짚과 오물, 그리고 피비린내가 뒤섞인 지하 감옥의 공기였다. 소영은 주먹을 꽉 쥐며 어둠 속을 응시했다. 썩은 짚 냄새가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김문수가 정말 여기 있을까. 살아있기는 한 걸까.
"의녀님, 어느 죄수를 치료하러 오신 겁니까?"
간수가 다가오며 물었다. 소영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김문수라는 자입니다. 열병이 심하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놈 말입니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어둠 속에서 횃불 하나가 앞서 나갔다. 감옥 깊숙한 곳에서 신음소리와 쇠사슬 소리가 들려왔다. 소영은 주먹을 꽉 쥐며 따라갔다.
"여기입니다."
간수가 무거운 철문을 열자, 소영의 숨이 막혔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김문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옷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얼굴은 멍투성이였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잠깐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치료에 집중해야 합니다."
간수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큰 소리 내지 마시오. 다른 죄수들이 깰 수 있으니까."
철문이 닫히자 소영은 김문수에게 달려갔다. 그의 상처투성이 손을 잡으며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문수야..."
김문수가 놀란 눈으로 소영을 바라봤다. "소영? 어떻게... 여기가 어디인지 알고 온 거냐?"
"정조 전하께서 독이 올랐어. 홍국영이 한 짓이야."
김문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전하께서는..."
"아직 살아계셔. 내가 응급처치를 했어.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
소영은 약낭에서 상처약을 꺼내며 김문수의 팔에 난 깊은 상처를 살펴봤다.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
"이것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몸이 죽을지언정 전하를 배신할 수는 없었소. 그 자들이 무엇을 물어도 입을 열지 않았소." 김문수가 소영의 손을 꽉 잡았다. "전하를 구해야 해. 홍국영의 음모를 막아야 한다고."
"알아. 그런데 증거가 필요해. 독을 만든 증거나 공모자들의 명단 같은 거 말이야."
김문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홍국영의 사저에 비밀 서고가 있어. 거기에 모든 기록을 보관한다고 들었어."
"사저로 들어갈 수 있을까?"
"홍 대감의 사저는 삼엄하게 지켜질 터이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오. 하지만..." 김문수가 소영의 눈을 바라봤다. "네가 여기까지 왔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지."
소영이 그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 말했다. "먼저 너를 여기서 나가게 해야 해."
"소영, 이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오. 이 몸은 어찌 되어도 좋으니 그대만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안 돼." 소영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우리가 함께 시작한 일이야. 함께 끝내야 해."
김문수가 소영의 손에 입맞춤을 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밖에서 간수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소영은 서둘러 약낭을 정리하며 일어났다.
"조금만 더 기다려. 오늘 밤에 다시 올게."
"각별히 조심하시오. 홍 대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교활하고 잔인한 자이니."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철문 쪽으로 향했다. 김문수의 상처투성이 얼굴이 어둠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갔지만, 그의 눈빛만은 또렷하게 기억에 새겨졌다.
간수가 문을 열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열이 좀 내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계속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지상으로 올라오며 소영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정조를 구하고 김문수를 구출해야 했다. 그리고 홍국영의 음모를 완전히 폭로해야 했다.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고, 모든 것이 그녀의 손에 달려 있었다.
소영은 의금부를 빠져나오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새벽 공기가 폐 속으로 차갑게 파고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정조에게 해독제를 전달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소영!"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소영이 돌아보니 김문수가 비틀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만은 결연했다.
"어떻게 탈옥을? 다시 들키면 더 큰 고문이 기다릴 텐데!"
"안 돼. 나도 가겠어." 김문수가 헐떡이며 말했다. "정조 전하를 구하는 일에 나도 함께해야 해."
"몸이 그런데 어떻게..."
"괜찮아." 김문수가 소영의 팔을 잡았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홍국영이 내가 탈옥한 걸 알면 모든 계획이 수포가 돼."
소영이 그의 상처투성이 손을 바라봤다. 손목의 족쇄 자국이 선명했고, 고문으로 인한 상처들이 아직 아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럼 서둘러야 해. 해가 뜨기 전에 창덕궁에 도착해야 해."
두 사람은 골목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소영의 의녀 치마가 바람에 펄럭였고, 김문수는 이따금 비틀거렸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해독제는 얼마나 남았어?" 김문수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두 번 분량. 하지만 정조 전하의 상태가 어떤지 몰라서..." 소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무 늦었으면 어쩌지?"
"아니야. 아직 늦지 않았어." 김문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홍국영이 어젯밤에 확인하러 갔다는 건 아직 살아계신다는 뜻이야."
멀리서 새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소영은 치마를 꽉 움켜쥐었다. 북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창덕궁 후원 쪽으로 들어가자." 소영이 방향을 바꿨다. "거기 숨겨둔 통로가 있어."
"통로?"
"궁녀들이 비밀리에 사용하는 길이야. 홍국영도 모를 거야."
두 사람은 창덕궁 외곽 담장을 따라 뛰었다. 소영의 발소리와 김문수의 거친 숨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하늘 끝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저기야." 소영이 담장 한 모퉁이를 가리켰다. "저 느티나무 뿌리 밑에 구멍이 있어."
김문수가 나무 아래로 기어가서 뿌리 사이를 살펴봤다. "여기 있네. 좁긴 하지만..."
"내가 먼저 들어갈게." 소영이 치마를 걷어 올리며 구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좁은 통로가 이어졌다.
김문수도 뒤따라 들어왔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기어가며 궁 안쪽으로 향했다.
"조금만 더." 소영이 속삭였다. "저 앞에 나오면 후원 연못이야."
통로 끝에서 빠져나오자 고요한 후원이 펼쳐졌다. 연못 위로 새벽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영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이제 어디로?" 김문수가 물었다.
"대조전. 정조 전하께서 계신 곳이야." 소영의 눈빛이 결연했다. "가자. 시간이 없어."
두 사람은 후원의 그림자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궁궐이 깨어나지 않은 새벽, 그들에게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소영의 손 안에서 해독제가 든 작은 병이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정조의 생명이 그 작은 병에 달려 있었다.
대조전 처마 밑에서 소영은 몸을 낮춘 채 궁 안의 움직임을 살폈다. 내시들이 아침 준비로 분주히 오가고 있었지만, 아직 대부분의 궁인들은 잠들어 있는 시간이었다.
"여기서 기다려." 소영이 김문수에게 속삭였다. "내가 먼저 들어가서 상황을 확인할게."
김문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위험해. 혼자 가지 마."
"괜찮아. 나는 궁녀니까." 소영이 미소를 지었다. "정조 전하를 살려내면 다시 만나자."
그녀는 치마를 정돈하고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대조전 앞을 지키던 내시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온 궁녀냐?"
"침전 청소를 위해 왔습니다." 소영이 공손히 절했다. "상선이 보내셨어요."
내시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훑어봤지만, 별다른 말 없이 지나가라고 손짓했다. 소영은 천천히 침전으로 들어갔다.
대조전 안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정조가 누워 있는 침상 곁에는 어의 한 명이 졸고 있었다. 소영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정조의 상태를 확인했다. 창백한 얼굴, 거친 숨소리. 독이 아직 몸속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소영은 품에서 해독제를 꺼냈다. 작은 병을 열자 약간 쓴 냄새가 났다. 그녀는 정조의 입술을 살짝 벌리고 조심스럽게 약을 넣어주었다.
"전하..." 소영이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살아나세요. 백성들이 전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해독제가 효과를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소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소영이 돌아보니 홍국영이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그녀를 훑고 있었다.
"궁녀입니다." 소영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청소를 하러 왔습니다."
"청소?" 홍국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이 시간에? 그리고 얼굴이 낯설구나."
소영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홍국영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훑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표정을 흔들리지 않게 유지했다.
"새로 들어온 궁녀입니다. 상선께서 일찍 와서 정리하라고 하셔서..."
홍국영이 그녀를 자세히 살펴봤다. 긴 침묵이 흘렀다. 소영은 숨을 참은 채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렇다면 어서 일을 마치고 나가거라." 홍국영이 마침내 말했다. "전하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조용히 하고."
"예, 알겠습니다."
홍국영이 침상 쪽으로 걸어가서 정조의 상태를 확인했다. 소영은 그 틈을 타서 조용히 뒷걸음질쳤다.
"잠깐." 홍국영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전하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 것 같은데?"
소영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홍국영이 다시 정조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의를 깨워야겠군."
그가 졸고 있던 어의를 흔들어 깨웠다. 소영은 그 사이에 슬며시 밖으로 나왔다.
김문수가 기다리고 있던 곳으로 돌아가자,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왔다.
"어떻게 됐어?"
"해독제를 드렸어. 홍국영이 나타났지만 넘어갔고." 소영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정조 전하의 상태가 좋아지는 걸 눈치챘을 수도 있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소영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홍국영의 사저로 가야 해. 독을 만든 증거와 공모자들의 명단을 찾아야 해. 그래야 이 음모를 완전히 폭로할 수 있어."
"그건 너무 위험해." 김문수가 머리를 저었다. "홍국영의 사저라니..."
"다른 방법이 없어." 소영이 그의 손을 잡았다. "정조 전하를 살리는 것만으론 부족해. 홍국영과 그 일당들을 모두 잡아야 해."
김문수가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그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알았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가자."
두 사람은 궁궐을 빠져나와 홍국영의 사저로 향했다. 새벽 안개가 한양 거리를 덮고 있어서 그들의 모습을 감춰주었다.
홍국영의 사저는 북촌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었다. 높은 담장과 견고한 대문이 위압적이었다. 소영과 김문수는 담장 너머를 살폈다.
"뒤쪽으로 돌아가자." 김문수가 속삭였다. "거기가 더 한적할 거야."
그들은 조심스럽게 사저 뒤편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뒷담이 낮아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올라가서 확인할게." 김문수가 담을 타고 올라갔다. "괜찮아. 내려와."
소영도 그의 도움을 받아 담을 넘어왔다. 사저의 후원은 조용했다. 아직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듯했다.
"서고는 어디 있을까?" 소영이 주위를 둘러봤다.
"보통 안채 깊숙한 곳에 있어." 김문수가 대답했다. "조심해서 가자."
두 사람은 건물의 그림자를 따라 움직였다. 마침내 안채 한쪽에서 작은 건물을 발견했다. 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지만, 창문 중 하나가 살짝 열려 있었다.
김문수가 창문을 통해 먼저 들어가고, 소영이 뒤따랐다. 서고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높은 서가들이 벽면을 따라 늘어서 있고, 수많은 책들과 문서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촛불을 찾아보자." 소영이 속삭였다.
김문수가 책상 위에서 촛대를 발견했다. 그가 부싯돌로 불을 붙이자 서고 안이 은은하게 밝아졌다.
"어디서부터 찾아볼까?" 김문수가 물었다.
소영이 서가들을 훑어봤다. "비밀 문서라면 따로 보관했을 거야. 책상 서랍이나..."
그녀가 홍국영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서랍들을 하나씩 열어보니 대부분 일반적인 문서들이었다. 하지만 맨 아래 서랍에서 작은 철함을 발견했다.
"이거야!" 소영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철함을 열자 여러 장의 문서들이 나왔다. 촛불을 가까이 대고 읽어보니 놀라운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독을 제조한 방법과 재료 목록..." 소영이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공모자들의 명단까지..."
김문수도 다른 문서를 들여다봤다. "이건 정조 전하를 독살한 후의 계획이야. 누구를 다음 왕으로 추대할 것인지까지 적혀 있어."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이 문서들이면 홍국영의 음모를 완전히 폭로할 수 있었다.
"이제 이걸 가지고 나가기만 하면..." 소영이 문서들을 품에 넣으며 말했다.
바로 그때 김문수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영아."
"왜?"
"만약... 만약 우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한다면..." 김문수의 손이 소영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소영이 그를 바라봤다. 촛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이 진지했다.
"나는 너를 사랑해." 김문수가 조용히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와 함께라면 어떤 위험도 두렵지 않아."
소영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촛불빛이 그의 진지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나도...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김문수가 소영을 벽 쪽으로 밀어넣으며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창문으로." 그가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서들을 더 깊숙이 품에 감췄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서재 뒤편 창문 쪽으로 몸을 낮춰 이동했다.
창문 너머로 새벽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직 어둠이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김문수가 먼저 창틀에 다리를 걸쳤다.
"내가 먼저 내려가서 확인할게."
그가 조용히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잠시 후 손짓으로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소영도 조심스럽게 창문을 넘어섰다.
마당의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김문수가 그녀의 손을 잡고 담장 쪽으로 향했다.
"저기 담장 너머로 넘어가면..."
"어디 가시는 겁니까?"
냉랭한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들렸다.
소영과 김문수가 동시에 몸을 돌렸다. 홍국영이 마당 입구에 서 있었다. 그의 뒤로 검은 옷을 입은 무사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특히 정체불명의 궁녀 양반은 더욱 그렇소."
홍국영의 시선이 소영에게 고정되었다. 촛불 없는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아무래도 내 서재를 구경하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김문수가 소영 앞으로 나섰다. "홍 대감, 이건 나 혼자..."
"김 선생." 홍국영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거짓말은 그만두시오. 궁녀 복장을 한 이 여인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가는군요."
소영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품속의 문서들이 옷깃에 바스락거렸다. 품속의 문서들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그 품 안에 뭔가 소중한 것을 숨기고 계시는군요." 홍국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혹시 내 서재에서 가져온 것은 아니겠지요?"
"저는 모르겠는데요." 소영이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홍국영이 비웃었다. "이 시간에 의금부에서 탈옥한 죄수와 함께 남의 집에 침입한 궁녀라... 참으로 흥미로운 조합이오."
무사들이 한 걸음씩 좁혀왔다. 담장까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 문서들을 본 이상, 너희는 살아서 이곳을 나갈 수 없다."
홍국영의 목소리에 차가운 살의가 배어있었다.
"특히 정체불명의 궁녀양반은 더욱 그렇지."
소영이 김문수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땀이 느껴졌지만, 떨리지는 않았다.
"문수야."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준비됐어?"
김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사이에 말없는 약속이 오갔다.
홍국영이 무사들에게 손짓했다. "잡아라. 단, 죽이지는 말고."
그 순간 김문수가 소영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담장 쪽으로 뛰어갔다. 무사들의 발소리가 뒤따랐다.
"놓치지 마라!"
홍국영의 외침이 새벽 공기를 찢었다.